*본 글은 분명 특정 정치적 입장을 염두에 두고 있는 글입니다. 필자는 분명 부족하고 생각이 짧습니다. 지적이나 비판은 잘 설명해주신다면 귀 기울여 듣겠습니다.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과거 부당한 권력과 절차에 맞서 싸운 존재들이 당시 그들이 해야 하는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파악하던 방법은 그들 내부의 집단 지성을 통해 방향성을 확인하는 방법뿐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절차 자체가 철저하게 오염된 권위의 시대에서 정당성을 사회 절차와 합의를 통해 발견하기란 비현실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사회적 절차를 준수하고 이를 통한 변화를 만드는 데 얽매였다면 그들은 당시 기득권 세력이 빚어낸 제도 속에서 매몰되었을지 모른다. 많이 일반 대중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가치판단의 틀을 그들 내부에서 찾는 역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까닭 때문인지 우리는 '진보적 지식인'이 어떤 지배적인 구조나 시스템 자체에 대한 반발적인 움직임 그 자체에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들이이미 국가와 구조의 영역에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과거와 같이 철저히 자신들 내부에서만 정당성을 논구 하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일 것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결국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 비절차적 정당화가 어떤 집단 내부에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역할인데 말이다.
이러한 행태를 보며 어떤 이는 지식인들이 정치판에 기웃거리지 말고 순수한 학문적 공론장에 위치하면서 그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필자도 이에 일부 공감하는 바이다. 학자는 학문의 영역에서 고고하게 존재해야 하기에 정치/경제/사회적 장과는 독립된 상징 투쟁의 공간을 확립해야한다 주장한다. 이는 담론의 참여자가 사적 이익을 초월하도록 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더 크게는 공론장이 근거하는 정당성 자체를 가변적이며 비합리적인 행태가 아닌 일관되며 합리적인 원칙에 의거하기를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때 묻지 않은 맑은 의식이 너희를 진리에 보다 가깝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필자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반 절차적이며 반구조적인 투쟁에 익숙한 이들에게 적절한 지적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필자는 작은 우려를 본 글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 바로 '독립적인 학문적 공론장'에 대한 것이다.
우선 개인적 차원에서, 외부와 독립된 '실천적 지식인'의 개념이 가능한가에 대한 우려가 있다. 본래 학술적 지식의 생산 목적은 지식 외적인 동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실천적 지식인이 자신이 준거할 지식을 탐구하는 과정이 단순히 논리적 정합성에 대한 흥미나 재미뿐이라면 그것은 맹목적 추종이거나 편중된 상상일 것이다.
도덕심리학자 나바이스는 신경생물학적 연구결과에 기초해 독립적이며 학문적인 윤리학의 영역이 '상상 윤리'라는 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것이 단순 개인이나 집단적 이익을 초월해 전체를 '상상'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바이스는 이 상상 윤리가 친사회적 감정과 단절될 때 편중되거나 단절된 상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유의미한 실천적 지식인의 학문적 준거는 현실에서 도래됨을 논자는 확신한다. 물론 완전히 자기 이익적인 학문적 도구주의는 명백하게 부당하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구조적 문제 영역에서는 벗어난 개인의 청렴성의 문제일 것이다.1)
다음으로는 구조적 차원에서 논의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바로 학문적 공론장의 존재가 갖는 권력에 대한 우려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68 혁명'과 관련된 담론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프랑스에 한정해서 68 혁명의 배경을 보자면, 당시 드골 내각은 검열과 언론 통제를 강화하여 국민의 정치적 자율권을 쇠퇴시켰고, 대의제를 통해 특정 집단의 권력 독점을 야기했으며, 공화주의적 시민 양성을 목적으로 교육정책 역시 보수화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68 혁명은 표면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와 드골 정부의 퇴진을 구호로 했으나 그 본질은 권위주의적 교육과 지식의 체계에 대한 반란으로서 태동한 것이다.
이때 푸코(M.Foucault)의 사상이 큰 주목을 받는다. 그는 담론적 비 담론적 차원에서 작용하는 지식/권력이 다른 것들을 배제하는 작용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전 학문들이 강조했던 '주체의 구성적 관점'은 오히려 권력의 그물망에 묶인 시민들이 권력의 작동 방식 메커니즘을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모든 사회는 특정 담론의 규칙성 아래에 있으며 이 규칙성을 통해 개인을 예속시키며 사회 전체의 체계를 합법화한다. 이 때문에 우리 주체가 정당하고 합리적으로 여기는 것들 속에 존재하는 권력의 억압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를 위해 푸코는 역사 속에서 주체 형성 과정을 설명하며 주체 개념을 오히려 소거해버린다.(계보학)
이러한 푸코의 극단적이며 파괴적인 사상의 의의는 바로 68 혁명의 의의가 함께한다.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보편적 지식의 체계로부터 배제되었으며 기능주의와 형식주의에 가려진 것들(대중적 지식)의 숨겨진 의미를 다시 발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를 분석하고 대상을 비판하는 방법은 결코 총체적인 이론에 따르는 것이 아닌 부분적이며 구체적인 방법이어야 하며, 이를 통해서만 저항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그가 무지를 옹호하거나 지식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정받는 지식과 그렇지 못한 지식 간의 서열화가 자의적임을 밝혀냄으로써 그 속에서 발화되는 권력의 효과를 고발하는 것이다.
푸코는 진보적 정치학이란 "구체적 실천 속에서 사회적 변화 가능성을 모색하고 여러 형태의 변화 사이에서 상호 의존성을 살피는 것"일 뿐이라 말한다. 이는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학문과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할 지점을 던져주고 있다. 학문은, 특히 철학은 어떤 지식이 다른 무엇보다 더 진실한 것인가를 자명하게 결정하는 이상적 결정론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대중의 경험으로 연결하는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학문적 노력은 억압적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을 설파하는 진리의 권력적 효과를 폭로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그 특별함이 있다. 논자가 느끼기에 이런 푸코의 철학은 자명함과 의식을 대표하는 학문보다는 거칠고 투박한 대중의 현실이나 감정의 발로와 함께해야 함을 외치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푸코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지식인의 역할은 더 이상 스스로를 대중의 앞에 혹은 옆에 위치시키고 그곳에서 침묵하는 진실을 밝혀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은 그 자신을 '지식'. '진리'. '의식', '담론'의 영역에서 권력의 대상이나 도구로 변환시키려는 권력의 여러 형태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때 푸코가 말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은 독립적인 학문적 공론장에서 상징적으로 투쟁하는 존재가 아닌 각자가 속한 일상적 공간에서 그들이 속한 지식/권력의 효과와 투쟁하는 개인을 의미할 것이다. 자명해 보이는 것에 대해 새롭게 질문하고 그 원리들을 뒤흔드는 존재 말이다. 2)
1) 필자의 나바이스에 대한 서술은 '박장호(2017), '다샤 나바이스(D. Narvaez)의 도덕교육', 『도덕심리학의 전통과 새로운 동향』, 교육과학사, 120쪽.' 참고
2) 필자의 푸코에 관한 서술은 '도승언(2018), "푸코와 68 혁명", 사회와 철학'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