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by young


레코드샵에 가면 언제 이 음악들을 다 듣나 싶고, 와인샵에 가면 언제 이것들을 다 마셔보나 싶다. 열심히 돌아다녀도 매번 놓치는 전시회가 있으며, 넷플릭스를 열면 못 본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차고 넘친다. 이때, 저마다의 취향이라는 것이 생기거나 혹은 발견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 개인의 책장이 다른 누군가의 책장과 같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장이 같다는 것은 같은 책 몇 권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이다. 물론 요즘처럼 책을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 시대에, 그 많은 책들 중 공통된 몇 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서로의 취향을 짐작해볼 수 있는 좋은 단서이다. 그러나 짐작까지가 적당하다. 일부 그 몇 권의 책만으로 취향을 단정 지어서는 곤란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위스키 성지여행> 이 책장에 꽂혀 있는 이유가 나에게는 '술'이지만, 누구에게는 '여행' 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무라카미 하루키' 자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책보다는 책장이다.


말하고 듣는 것보다, 읽고 쓰는 일을 편애하는 나는 어디를 가든 책장을 그러니까 책장에 꽂힌 책들의 큰 그림을 유심히 본다. 작든 크든 책장이 있다면 거기에 꽂혀 있는 책들이 부끄러워할 만큼 내 모든 시선을 쏟는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의 제목이나 작가들, 책들의 주된 테마와 배열 위치 같은 것들을 보고 있자면... 그것은 책장 주인의 마음과 정신의 지도를 한눈에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면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상대방의 자기소개만 들어버린 것 같아 왠지 속으로 미안해지고는 한다.


오늘은 나의 책장을 바라본다. 타인에게 미안해할 일 없어 좋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산뜻한 긴장감을 느껴 똑똑 노크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의 시선을 타지 않은 책장이라 아주 수줍음이 많을 것이다. 처음에는 책에 손을 대지 않고, 꺼내 보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다시 아래서 위로 이리저리 미끄러지듯 둘러본다. 최근에 읽은 책부터 과거로 한 권씩 한 권씩 되돌려본다. 이 책에서 다음 책으로 혹은 이 주제에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게 한 나의 의식의 발단과 흐름을 짚어나간다. 그러다 보면 불현듯 아! 하고 현재 나의 마음을 낳은 과거 나의 마음이 보인다. 어떤 마음은 차갑게 식어 책장 깊숙이 숨어있고, 어떤 마음은 내 눈길만 닫아도 번쩍하고 빛을 내며 닫혀 있는 책을 뚫고 나온다.


책장에는 나도 모르게 내가 기록한 '나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꽂혀있다. 글을 읽기 버거울 때나 글은 읽고 싶은데 그럴만한 글이 없을 때, 글을 쓰기 힘들 때나 글은 쓰고 싶은데 쓰고 싶은 글이 없을 때, 그리고 나도 나를 알기 힘들 때 그래서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을 때.


그럴 때 가끔은 책을 덮고 '책장'에서 '나'를 꺼내 읽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