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말 필요 없이.
우리 삶에서 말은 점점 짧아져왔다.
긴말은 짧게, 짧은 말은 더 줄여서, 줄임말은 표정 있는 그림으로.
말이 사라지는데 글이라고 남아있을 리가 없다. 오늘 내가 읽고 쓴 글은 무엇인가 하면, 핸드폰 속 도막난 네모창에 찍힌 글자 몇 개를 확인하게 될 뿐이다.
내가 여기 흰 화면에 긴 글을, 특히나 책에 관한 긴 글을 쓸 때, 이 글을 다 읽는 사람은 몇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잠깐이라도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은 또 추려질 것이고, 다시 그중 그 책을 읽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읽지 않는 시대에 글을 쓰는 것의 효용성은 바닥난 지 오래다. 그나마 '돈'이나 '집'을 가져다줄 수 있는 '법' 정도는 알려줘야 글의 효용과 가치를 논해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백 페이지에 걸친 장엄하고 아름다운 서사를 써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다. 한 인간이 태어나 죽음의 소실점까지 이어지는 여정에서 교차되는 친구, 연인 그리고 가족이라는 크고 작은 점들을 세밀하게 풀어나간다. 눈을 감고 본 것을 쓰기 위해 수많은 밤과 낮을 안갯속에서 헤매었을 것이다.
이렇게 피어난 긴 글에는 돈과 집에 대한 방도가 없다. 오히려 이 긴 글을 읽는 사람은 책을 사느라 돈을 쓰게 되고 책을 꽂아야 하니 집은 그만큼 줄게 된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즉, 어느 쪽에게나 효용은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러니까 긴 글을 쓰고 또 읽는 사람들은 효용을 따지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것인가?
아니다.
효용을 따지지 못하는 게 아니라, '효용 따위는 버린 것'이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글을 왜 읽어야 하는지를 여기에 적자면 그 이유가 너무 많기도 하고, 읽어야 할 명분 따위를 들이대는 것조차 구차하다.
만약 여기까지 이 긴 글을 읽어내려온 몇 사람 중,
다시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까지 살펴볼 준비가 된 사람이 있다면 지체하지 말고 이 책을 펴는 것이 좋겠다.
당신은 이미 효용을 버릴 자격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