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by young



12호차 3D.

나지막이 소리 내어 읆어본다. 멀리서부터 기차역 플랫폼의 활기찬 웅성임과 곧이라도 달려 나갈 듯 식식거리는 기차소리가 심장을 간지럽힌다.


떠나는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 역 안에 있는 카페로 들어간다. 기차를 놓칠까 하는 두려움보다는 기차를 기다리는 설렘을 좀 더 오래 가까이서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떠나오고 떠나가는 사람들의 어수선함이 커피향을 싣고 달려와 나를 끌어당긴다.


'아이스 카페라테 2잔 나왔습니다!'

'아 맞다, 칫솔 안 챙겼다!'

'얘는 왜 안 와? 10분 전인데... 연락 없어?'

'샷 추가하신 아메리카노와 블루베리베이글 나왔습니다!'

'몇 번 플랫폼이야? 아직 안 떴지?'

'가면 일단 체크인부터 하자. 날씨 좋아서 너무 다행이다.'


맞아.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야.

내게 묻지도 않은 누군가의 말에 혼자 속으로 대답해본다.

다른 때라면 5분도 앉아있지 못하고 도망 나왔을 텐데 기차를 타는 날은 카페의 번잡함에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카페의 창밖을 응시한다.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 제법 큰 배낭을 메고 있는 사람들, 멈춰 선채로 두 눈이 바쁘게 표지판과 휴대폰을 오가는 사람들, 기다리던 사람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 그들과 와락 껴안는 사람들, 제복을 입은 무표정한 사람들, 두 손을 꼭 잡은 연인들과 부모와 아이들.


일상을 떠나는 사람들과 일상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로 어우러져 오늘을 새롭게 한다.

6번. 타야 할 기차의 플랫폼 번호가 전광판에 깜빡인다.

아직 반이 남은 커피를 들고 저들 속에 기꺼이 합류한다.


12호차 3D.

이번에는 눈으로 기다란 기차를 촘촘히 읆어간다. 미리 탑승해 앉아있는 여행객들의 소곤거림을 뒤로하고, 저기 창가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빈자리 하나. 12호차 3D.


무엇을 타든 언제나 내 자리는 창가 쪽이었다.

이렇게 날이 좋아 볕이 쭉쭉 뻗어 들어오면 이 자리에 영원히 앉아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가방을 선반 위에 올리고 나서 가벼운 몸으로 자리에 앉는다. 기차의 식식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출발시간에 간신히 맞춰 도착한 지각생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면, 이제 떠날 시간.


창밖 풍경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빠르게 달려 사라진다. 한동안은 익숙한 도시의 모습이 펼쳐지지만, 어쩐지 나는 학교 수업을 빼먹고 선생님 몰래 놀러 나가는 학생이 된 것 같은 묘한 스릴을 느낀다.


속도에 몸을 맡기고 떠난다는 흥분에 익숙해질 때쯤,

우뚝 솟아있던 빌딩들이 물러나고 파란 하늘에게 그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다. 어제보다 커진 하늘은 작은 나를 품는다.


끝없는 하늘에 안겨있다 보면 좌표 어딘가에 찍히지도 않을 대지에 이름 모를 초록들이 마중을 나온다. 초록잎들은 여러 손에 햇빛을 살포시 쥐고 반짝반짝 흔들어댄다.


철컹 철컹

내가 탄 12호차가 반갑다고 대답이라도 하듯이 소리를 낸다. 그러면 그들은 내 창가 쪽으로 다가와 초록색 손끝과 손바닥을 스친다. 창이 투명한 녹색으로 물든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언제 어디에 도착하리라는 마음을 미뤄두고 꿈을 꾼다.

여기에 영원히 앉아 어디든지 가는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