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by young

153, 272, 120, 740, 1165, 109, 104, 110A, 1126. 나의 하루를 움직이는 숫자들. 가족과 연인의 핸드폰 번호는 가물가물할 때가 있어도, 이 번호만큼은 헷갈리는 법이 없다. 똑같은 머리와 교복을 한 애들 사이에서 부모가 단박에 자기 아들딸을 알아보듯이, 퍼렇거나 새초록한 버스 여러 대가 한꺼번에 정류장으로 달려와도 나는 내 버스를 저 멀리서부터 알아차린다. 매일 만나도 반갑고 안심이 되며, 어쩌다 그것이 나를 스쳐 지나가면 그렇게 약이 오르고 안타까우니 이건 관계로 치자면 짝사랑이나 다름없다.


자가용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버스를 임시 자가용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각자 선호하는 자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버스 맨 뒤 상단 자석 중에서도 출입문이 있는 왼쪽 끝자리에 앉는다. 버스에 타자 마자 나의 눈은 버스 맨 뒤편으로 향한다. 그 자리가 비어 있다면 어떤 하루의 시작 또는 끝도 이보다 평화로울 수는 없다고 느낀다. 특별히 이 자리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일단 집을 나오면 모두는 모두의 시선의 노예가 된다. 개인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못한 채, 마주하는 시선들의 의도는 불투명하다. 그런 것들에 대해 적잖은 피로감을 느끼는 나는 버스 뒷좌석에서 잠시나마 숨어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어차피 어디에 앉든 뒷사람이 보는 것은 내 뒤통수뿐이지 않느냐' 고 하겠지만, 뒤통수에도 눈이 있다. 그 눈은 엉뚱해서 눈이 해야 하는 색이나 형태 등은 분간도 못하는 주제에 자신을 향한 시선만큼은 기민하게 알아차린다. 그래서 난 버스 맨 뒤 좌석이 아니면 조금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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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맨 뒤 좌석에 앉고 나면 나 역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건 타인의 뒤통수들. 하지만 그 뒤통수에 눈이 있다는 걸 알기에, 나는 잠시나마 그 눈들이 쉴 수 있도록 내 눈길을 거둔다. 거둔 눈길을 창밖으로 날려 보내면 익숙한 거리의 풍경들이 실려온다. 이미 잘 알고 있는 배경들의 나열이지만, 날씨, 시간이나 요일 그리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같은 배경들이 묘하게 그 분위기를 달리한다. 봄볕에 반짝이는 초록 잎들과 꽃송이들이 싱그러워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어느 날 봄비에 젖어 있는 그것들을 볼 때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봄의 냉기가 코끝을 차갑게 해 울적해지고는 한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버스에 숨어 그날의 감상에 충실해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몇몇은 내린 듯싶고 몇몇은 새롭다.


결국 내려야 할 정류장이 서서히 다가오고, 거기에는 다시 마주해야 할 시선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한차례 숨을 고르고 천천히 빨간 하차 버튼을 누른다.

S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