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니마을 Sep 15. 2021

너무 빠른 친구의 부고


가능하면 늦게 오기를 바랐던 친구의 영원한 이별 소식이 왔다.


10년 전, 나는 건강상의 문제로 가족들에게 짐을 지웠고 여전히 그 상황은 진행형이다. 큰 아이가 아직 대학을 가기도 전에 덜렁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것도 한창 바쁜 고3 시절이었다. 산을 좋아했던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지리산 종주를 꿈꾸던 꿈은 자연히 무산되었다. 대신에 지리산 언저리에 터를 잡고 사는 벗의 초대를 받아 지리산 둘레길을 도는 것으로 위안으로 삼았다. 친구는 계곡에 첨벙첨벙 들어가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둘째와 천진난만하게 놀아주었다. 아버지가 해 줄 수 없었던 것을 벗이 대신해 주었다.

"어이 시원하다. 자 들어와 봐라, 계곡에 와서는 이렇게 물속에서 노는기라"

거저 시원하다는 말만 연발하는 일행들의 소리를 뒤로 하고 물속으로 첨벙하고 들어간 친구가 둘째에게 물에 들어오라고 재촉하면서 하면서 말했다. 늘 절제하며 생활하던 것에 익숙한 도시 아이가 아빠 친구를 따라 물에서 들어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고등학교 동창이기는 했지만 정작 학교 다닐 때는 서로 몰랐다. 마흔이 넘어서 한 번씩 모이는 동창회에서 만났다. 늘 부인을 대동했다. 참 특이했다. 알고 보니 지리산 언저리에서 살면서 모임에 늘 부인과 같이 했다. 참 보기 좋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친구들은 그저 모여서 객쩍은 소리로 삶의 스트레스를 풀던 시절이었다. 부인들은 대부분 집에서 아이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부부와 아이들이 산골에 살면서 친구들 모임에 부인을 늘 동반하고 다녔다. 그때부터 알게 된 인연이 주기적으로 소식을 전하고 왕래를 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나이 갓 마흔을 넘기고 돌연 도시 아파트를 버리고 산골로 둥지를 옮긴 친구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귀촌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던 시절이고 사업장을 가지고 열일을 하던 시절이라 집안에서도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선친께서는 당신 아들이 철딱서니 없이 시골로 가고 싶어 이사를 하는 줄 알고 며느리에게 설득하지 않고 부창부수 한다고 핀잔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실은 친구 처가 아파트 생활이 너무 맞지 않고 건강상 힘든 일이 생겨서 시골살이를 원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부모님께 있는 그대로 알릴 수 없어서 그저 철딱서니 없는 아들로 살고 있다고 했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흙냄새를 맡고 살고 싶어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가서 살자고 아내를 설득하게 되었고 지리산 기슭에 살고 있는 친구 집을 현지 체험을 겸하여 방문하자고 물어보았다. 이에 아내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큰아이가 품을 떠나게 되어 가족 여행도 겸하고 일종의 시골살이가 어떤지 탐방하는 마음으로 가게 되었다. 앞에 조그만 내가 흐르고 마당은 아기 주먹만 한 까만 몽돌 자갈로 깔린 아담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집이었다. 시골집이지만 먼지도 없고 주인들의 손길이 곳곳에 베인 깨끗한 집 인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중에 아내가 말하길, 이렇게만 집을 지어서 산다면 시골로 이사를 가겠다고 했다. 친구 집 덕분에 시골살이 허락을 받은 셈이다.


이층 발코니에서 바비큐와 점심을 하고 지리산 둘레길 걷기, 저녁으로 맛난 향토 음식으로 친구 부부의 환대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원래 반응이 맹물 같은 인사라 섭섭하게 생각할 수 도 있었겠다 싶다. 비록 늦게 알았지만 어떻게 살아왔는지 밤이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으로 같은 고향 출신임을 알았고 학교 다닐 때 한 번씩 했던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친구의 처는 같은 국민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작년 여름 화단에 돌담을 쌓을 때 사용하라고 친구가 주어준 돌. 여전히 마당 자갈밭에 나란히 있다.

뒤늦게 시작한 골프로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친구는 청청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검사를 하던 와중에 암세포를 발견하게 되었고 정밀검사 결과 폐암이 깊어 뼈까지 전이가 된 상태라고 했다. 너무 늦은 발견으로 항암치료 대신 암과 같이 하면서 삶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불과 한 달 전에 낙동강이 바라다 보이는 삼랑진 산 중턱에 집을 지은 친구가 아픈 친구를 초대했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참석한다고 하여, 만사를 뒤로 하고 동창 부부들이 모여서 소란한 점심을 했다. 평소처럼 안부를 묻고 조금 야윈 것 빼고는 크게 힘들어 보이지 않아서 좀 더 오래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가졌다.


지난 수요일 갑자기 집 주변 대학병원 응급실에 와 있다고 연락이 왔다. 몸 상태가 악화되어 응급실로 오게 되었고, 늦은 퇴근길에 아내와 만난 친구처의 모습은 매우 지쳐 보였지만 담당의사의 말을 전하면서 위안과 희망을 품고 있었다. 다음날 퇴근길에 친구처와 통화한 아내 얼굴이 매우 어두웠다. 극심한 고통으로 진통제로 처방을 하고 아이들을 불러 아버지와 이별을 준비하라고 했단다. 의사들이 낫는다는 장담은 하지 않지만, 좋지 않은 결과는 잘 예측한다는 보험 하는 친구의 넋두리다.


금요일 오후에 비보가 왔다. 불과 3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2021.9.1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