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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니마을 Sep 16. 2021

[수청마을에 살아요 01] 앞뒤 살피기

시골살이는 도시를 떠나기로 마음먹으면 가능하다.


요즘 인사처럼 듣는 말이 '참 부럽다'는 말이다. 시골살이가 다른 사람들, 특히 중년이 넘어선 남자들에겐 일종의 로망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절이 코로나라는 역병에 시달린 탓에 사람들이 많이 지친 까닭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그것보다도 도시의 터전을 털어버리고 시골로 내려온 것에 대한 부러움과 일반적인 중년 남자들이 가지는 아내들의 반발심을 설득한 것에 대한 부러움일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처분하면 이런 시골집을 사고도 남을 것 아닙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면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그걸 누가 모르나 하는 표정이다. 시골살이와 도시에서의 생활 중 하나를 선택을 하면 어찌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시골살이를 지금의 도시 생활을 누리면서 필요할 때 한 번쯤 가서 힐링을 하는 일로 생각한다. 그래서 힘들다. 그건 별장을 갖는 일과 같다. 사람들이 하고 싶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 중에 하나가 별장 갖기이다.


도시에 집을 두고 근교나 깊은 산속에 집을 가질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야, 시골살이는 그 집을 관리할 수 있는 환경적 여건만 되면 언제든지 가능하다. 관리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관리할 수 없는 별장을 갖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건상 별도의 집을 준비할 상황이 아니라면 도시와 시골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나 역시 도시에 살면서 주말에 시골로 가는 것을 원했다면 시골살이는 못했을 것이다.


나의 시골살이의 시작은 살고 있던 아파트를 과감하게 처분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터를 찾는데만 거의 5여 년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집이 팔리고 전세를 전전하면서 설계를 하고 집을 지어 이사를 하는데도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세월이라 할 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땅을 딛고 사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처음으로 내 집이라고 가졌던 아파트는 계약금만 있으면 내 집 마련이 가능하다는 시공사의 말에 혹하여 덜렁 계약을 했던 집이다. 입주가 시작되자마자 시작된 IMF 사태로 부부 월급의 거의 대부분을 고이율의 대출이자를 갚는데 털어 넣어야 했던 집이었다. 처음에 화장실만 우리 것이고 나머지는 은행 것이었다. 아이들의 추억이 있고 가족의 추억이 오롯이 박혀 있던 집이었다. 부부가 소위 갈아타기를 하면서 재테크를 할 만큼의 늘푼수*가 없어서 새집이었던 아파트가 서서히 낙후된 옛날 아파트가 되었다. 그런 데다가 매매가 이루어질 무렵 경기 여파로 유독 아파트 시세가 하락했을 때였다. 더하여, 아이들 할머니가 매수인 새댁의 통사정에 1500만 원을 깎아달라며 아들네 사정보다는 그 새댁의 말에 거들고 나섰다. 아파트를 팔고 나니 무슨 조화인지 아파트 시세는 기세도 등등히 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우린 재물과는 거리가 있나 보다' 자조적 넋두리로 전세를 전전했다. 


그런 탓에 근교 시골에 겨우 집터만 마련할 정도의 자금으로 시골살이 준비를 시작하였다.   


늘푼수 : 경상도 사투리. 융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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