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달간의 일본어 공부를 마무리하며
올해 3월 1일. 느닷없이 일본어 시험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끌어왔던(?) 공부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감정을 조금 더 파헤쳐보자면.. 회사에서 보통 연말에 성과와 역량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가 2월쯤 발표되게 된다. 2월에 발표되는 것은 단순히 성과와 역량뿐 아니라 그 성과에 따른 성과급과 역량에 따른 새로운 해의 연봉이 함께 발표된다.
365일, 12개월, 사계절이라는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 동안 나는 얼마나 성장한 것인지 제대로 평가받은 것인지 판단하기가 사실 쉽지 않다. 한주의 7일 중 5일을, 깨어있는 시간을 어림잡아 16시간이라고 봤을 때 그중 8시간 이상을 보내는 회사에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만큼 성장하기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회사 외적으로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성과나 역량이 내가 원하는 만큼 성장하지 않았거나 혹은 성장했어도 인정받거나 평가받지 못했어도 스스로가 스스로를 키울 부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냥 마음먹은 게 일본어였다.
대학교 재학 시절 뒤늦게 교환학생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고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학교에서는 학점, 영어성적, 면접점수를 합산하여 등수를 매기고 상위 랭크부터 교환학생으로 갈 수 있는 학교를 고르게 했다.)에 영어권 학교는 없어서 영어로 수업하는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어를 1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일본어로 숫자도 셀 수 없는 상태로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다른 외국인 학생들과 함께 영어로 일본어를 배웠다.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고 일본어를 배우러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주 대단한 수준으로 배우고 오진 못했지만 당시 현지 학생들이 언어교환에 관심이 많아서 수업 외적으로도 배울 기회가 많았고 나름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기초적인 일본어는 배우고 돌아올 수 있었다. (어릴 때 아빠가 조기교육 해주신? 한자 공부도 큰 힘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은 하염없이 흘렀고 이후 공부로든 업무로든 일본어를 쓰거나 할 일이 없었고 딱히 일본어 실력이 향상될 계기가 없었으나 그래도 조금이라도 배웠던 그 씨앗을 살피고 살펴 취미생활로 이어오고 있었다. 일본어 드라마를 보거나 일본어 라디오를 듣는 등 그 언어에 대한 흥미는 놓지 않고 있었고, 가끔 해외여행을 가서 만나게 되는 일본 사람들에게 몇 문장 일본어를 하면 신기해하기도 하고 더듬더듬 대화를 나누는 재미도 있었다.
나의 특징 중 하나는 기록하는 것과 정리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계획은 잘 세우지 않아도 기록은 하는 편이다. 집에 있는 A3 용지 두 장을 가져다가 사인펜으로 줄을 찍찍 그어 달력을 만들었다. 한 장에 2달치 날짜가 기록되도록 손수 요일과 날짜를 적었다. 그렇게 일단 2장의 총 4달치 빈 달력을 만들었다. 이제 매일매일 한 칸마다 그날 공부한 내용을 쓸 예정이었다.
일단 일본어 공부를 제대로 하기로 마음먹고 다음으로 한 일은 회사 사내 게시판에 짧은 다짐의 글을 올리는 것이었다. 우발적으로 든 결심이긴 했지만 일단 마음을 먹었고 끝까지 해보겠다는 마음을 알려두어야 응원의 힘도 얻고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덧붙여 매일 공부하면 인증샷을 남기겠다고도 적었다. (인증샷은 매일 올리다가 조금 부끄러워져서 한 주에 한 번씩 올리는 것으로 바꾸었고 마지막 한 달 정도는 아예 올리지 않았다.)
기존에 N1 문법, 독해, 청해 문제집을 가지고 있던 것이 있었다. 검색해보니 내가 책을 사자마자 개정판이 나왔더라. 그렇지만 일단 문제집에 안 푼 문제들이 많으니 기존 과목들 교재들은 일단 사지 않고 문자/어휘 문제집만 추가로 구매했다. 점수 배분상 적지 않은 부분이라 따로 문제집을 사서 공부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책을 주문했다.
(달력은 손으로 만들었지만) 장비는 중요하다. 평소 핑계가 없어 사지 못했던 필기류도 장바구니에 담고 연습장으로 쓸 노트와 메모패드를 몇 개 주문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 반 정도 뒤에는 스톱워치도 구매했다. 수험생들이 많이 쓰는 시간 재는 워치. 공부 시작할 때 START를 누르고 중간에 쉴 때는 다시 STOP을 눌러 순수하게 공부에 집중한 시간을 재는 시계를 사용했다. 이렇게 해서 매일 공부한 시간을 누적해서 기록했다. 가장 적게 공부한 날은 12분이었고, 가장 많이 공부한 날은 2시간 50분을 했다.
블로그와 유튜브에 이미 JLPT를 합격하신 선배님들의 노하우가 가득하다. 어떤 부분을 유의해서 공부했는지 놓치면 안 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초반에 많이 검색해봤다. 제대로 된 방법으로 공부해야 합격 확률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는데 어떤 방법이든 절대적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공부는 출근 전에 하거나 자기 전에 했다. 출근 전에 공부할 때에는 아침에 눈을 뜨면 그냥 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서 출근 준비를 하거나 아침 간식을 먹거나 했다. 이렇게 할 때가 집중이 제일 잘 되고 좋은 루틴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침마다 기상시간이 다르고 아침에 책상으로 갈 마음이 들지 않거나 업무를 조금 일찍 시작해야 해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날이 있기도 했다. 그런 날은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여유시간을 보내다가 자기 전에 잠깐 공부를 하고 자곤 했다. 2시간 50분 했던 날은 아침저녁으로 모두 공부를 한 날이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손으로 만든 달력에 공부한 내용을 (예. 모의고사 1회 독해)을 간략히 적었다.
문제집을 사서 문제를 풀고 기출 어휘와 주요 어휘들을 외웠는데 약간 백사장에서 진주 찾는 기분도 들었다. 이걸 어느 세월에.. 하는, 족집게 선생님이 오셔서 '이 중에 나옵니다' 하고 몇백 개라도 골라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한 3 회독 정도 했다. 그런데도 자주 쓰지 않거나 자주 보이지 않으면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예문을 통째로 암기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은데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 채 시험에 응시했다.
초반 2개월은 문자/어휘/문법 공부에 집중했다. 어휘와 문법을 모르면 읽히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 실제로 독해나 청해를 풀어도 모르는 단어 공부하다가 하루가 다 가기 때문에 초반 2달(3월, 4월)은 어휘와 문법공부에 집중을 했고 (공부하다 보니 어휘가 너무 부족해서 N2, N3 문제집의 어휘들도 복습을 병행했다) 5월부터는 독해와 청해 문제도 풀기 시작했다.
덧붙여 시험공부를 하면서 마음에 일었던 생각을 적어보자면,
사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직감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해서는 이 시험에 합격할 수 없겠구나. 내 실력과 남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합격 가능성이 바뀌지 않더라도 내 실력에 변화가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떨어질 걸 알면서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단어를 단어장에 옮겨 적으면서 이걸 한 번 이렇게 써서 어떻게 외워지지 했는데 그 단어가 다음번에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하면서 이걸 내가 봤던 단어인가 하면서 다시 찾아보게 되고, 이거 뭐 할 때 나왔던 건데 하면서 또 찾아보게 되고 이런 식으로 새로 나온 단어를 모두 다 외우진 못하더라도 어쨌든 더듬더듬 나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전에 봤던 드라마를 다시 보면 그땐 안 들렸던 단어가 들리는 그런 순간들이 생길 때마다 다음날 공부를 또 하게 만드는 힘이 되어줬다.
변화가 가장 크게 느껴진 순간은 독해를 할 때인데 좋아하는 무라타 사야카 작가님의 에세이를 번역본으로 읽었지만 원서도 사서 그냥 개인 소장용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 참에 공부에 활용해보고자 필사를 했다. 처음에는 한 페이지 필사하는데 한참이 걸렸는데 두어 달 지나고 나서는 눈으로 글이 어느 정도 읽히고 모르는 단어 몇 개 표시해두었다가 찾아보면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기존에 번역본을 읽었기 때문에 내용이 어느 정도 유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장의 주어와 조사 동사 어미변화나 접속사 등이 끊어져서 보이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느낌 계속 유지해야 해!)
JLPT N1 시험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문자, 어휘, 문법으로 구성된) 언어지식, 독해, 청해 이렇게 총 3과목으로 구성되고 각 과목별로 총점은 60점, 총점은 180점인 시험이다. 그리고 N1의 합격의 조건은 3과목 중 각 과목의 과락(19점 미만)이 없으면서 총점이 100점 이상이어야 한다. 특별히 못하는 과목이 있더라도 다른 과목에서 점수를 잘 받으면 합격할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다른 과목을 잘해도 과락이 있으면 합격할 수 없다.
시험을 시작하면 1교시에 언어지식(문자, 어휘, 문법)과 독해를 한 번에 보고 20분간 쉬는 시간을 갖고 뒤에 2교시에 청해를 보고 시험이 종료되는데 1교시에 시험지를 받아 풀면서 망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절대 엄살 아님)
솔직히 시험장에 가는 길에는 100점이 커트라인이라면 내 점수는 97점에서 103점 사이 정도 나오고 운 좋으면 합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었는데 시험지를 받아보고 내가 스스로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1교시. 언어지식/독해
일단 1교시부터 이야기를 해보자면 아예 지문을 못 읽은 문제가 몇 개 있었다. 중간까지 풀다가 너무 지쳐서 뒤부터 풀기 시작했는데 마킹하면서 안 푼 문제를 다시 풀려고 했더니 시간이 남지 않았다. 그래서 안 풀고 넘어간 문제들은 죄다 찍어야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찍어야 하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망했다! 만세!
2교시. 청해
이거 혹시 1.25배속 아닌가요? 일부러 녹음된 거 빨리 감기 한 거 아니죠? 연습문제나 모의고사보다 훨씬 덜 친절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빨리 말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긴장하고 힘들어서 그렇게 들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확실히 기존 것 보다 난도가 높게 느껴졌다. 그래도 문제가 계속되니까 정신을 흐뜨러트리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어서 좋았다.
시험이 1시 30분에 시작해서 4시 50분쯤 끝나니 (중간에 휴식시간 20분) 거의 3시간을 내리 집중하는 경험은 요즘 같은 정신 산만한 현대사회에 쉽지 않다. 그나마 가장 길게 집중하는 게 영화인데 영화도 2시간이면 긴 편에 속하니. 뭐든 일시 정지하고 컨택스트 스위칭하고 하이퍼링크를 클릭하는 세상에서 하나를 놓고 내리 집중해서 골똘히 무언가를 풀어보는 경험도 약간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항상 떨어질 것 같은 시험을 보러 갈 때 그냥 보지 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이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진급이 누락되거나 지원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그런 개념은 아니라서 크게 부담이 없었다. 말 그대로 실력을 점검하는 느낌! JLPT는 매년 7월 초, 12월 초 이렇게 일 년에 2번 치러지는데 작년 12월 시험이 코로나 악화로 취소되었어서(모두 취소는 아니고 서울권역 대상만 취소됨) 이번 시험을 기다리신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다들 오래 기다리신 만큼 좋은 결과 있으셨으면 좋겠다! 먼저 가세요들!
일요일에 시험을 보고 돌아와서 문제집 절반 정도를 버렸다. 사실 내가 공부하면서 순간순간 꿈꿨던 그림은 시험 보고 와서 일본어 관련 문제집을 싹 다 버리는 것이었다. 이제 시험은 끝이다. 나는 그다음 단계로 간다! 이런 느낌으로. 그런데 그렇게는 못했고.. 기존에 N3, N2 문제집도 모두 가지고 있었던 터라 오래된, 그리고 급수가 낮은 책들을 솎아내서 버렸다. N1 문제집들은 버리지 못했는데 언젠가 다시 시험을 치게 되면 문제집을 한 번 보고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일단 킵해두었다.
오는 12월에 다시 시험을 볼까? 아마 신청하지 않을 것 같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 시험에 합격할 만한 간당간당한 수준이 아닌 그 이상의 실력을 만들고 나서 시험을 보면 좋을 거 같다. (물론 그런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조건을 성립하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했던 것이 아니다 보니 사실 급수가 있어도 쓸 곳이 없다. (지금도 JLPT N2급을 딴 상태이지만 이걸 아는 사람은 나와 배우자 둘 뿐.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이제 알게 되셨지만)
앞으로 일본어 공부는 계속 할 것이다. 그런데 방법이 시험 준비를 위해 단어를 외우고 문제집을 푸는 게 아니라 일본어로 된 책을 읽고 일본어 라디오를 듣고 일본분들이 운영하시는 유튜브 같은 것도 보려고 한다. 부담 없이 재미로 계속 공부는 이어나갈 생각이다.
만에 하나 N1에 합격하게 될지라도 인생에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결과가 어떻든 꾸준히 무언가를 해나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자존감도 더 다져진 것 같고 다른 무언가를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더라도) 새롭게 꾸준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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