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초 내게 많이 들려온 소식은 죽음이다. 누군가의 생이 온전히 끝나고, 그 생의 챕터에 종지부를 찍은 순간. 그 소식은 부고장으로 전달된다. 순간은 대게 구두로 전해진다.
연말, 노의 아버지 장례식장에 갔다. 홀로 장례식장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해 친구아버지의 장례는 처음이 아니었다. 다른 친구아버지 잰의 부고소식도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음날,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 장례식장에 먼저 갈 거야?
- 응 얼른 짐싸고, 얘들한테도 일 끝나고 오라 해야지
- 알겠어 우리도 회사에 전화해서 말하고 바로 가자
엄마아빠는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장례소식에 눈을 번쩍 떴다.
엄마, 장례식 갈 거야?
응, 너도 갈 거지? 준비하고 천천히와.
잰이 아버지 장례식 말하는 거지?
너 할머니 돌아가셨어.
할머니? 외할머니?
응, 준비하고 장례식장으로와 엄마아빠먼저 가있을게.
엄마의 표정은 제법 침착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펑펑 울던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이번에도 펑펑 울까. 일이 끝나고, 동생과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친척들을 보는 날이었다.
외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누구보다 많이 우셨다. 먼저 가면 어떡하냐, 나를 챙겨준다고 하지 않았냐 말했다. 할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 소녀였다. 삼촌과 이모보다 더 많이 우는 할머니를 이모가 달랬다.
"엄마, 엄마도 이제 씩씩해져야 해. 엄마 혼자 살아가야 해. 뚝 그쳐"
할머니는 그저 말없이 할아버지의 손을 어루만지며 울었다. 8남매 중 막내인 엄마도 같이 눈물을 흘렸다. 사촌들이 고개를 뒤로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그 엄숙한 분위기에 나도 절로 눈물이 났다. 장례식이 끝나고는 어른들의 회의가 이어졌다. 그중 가장 막내인 엄마에겐 발언권이 없었다. 그저 삼촌들의 의사를 따를 뿐. 하나의 안건은 할머니를 누가 모시냐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할머니를 모시겠다 하지 않았다. 엄마는 우리 집을 이사할 때 할머니도 같이 살자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시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년 정도는 집에서 지내셨다. 요양사가 주기적으로 방문을 하고, 막내외삼촌과 몇째 외삼촌일지 모르는 두 분이 자주 방문하셨다. 엄마도 자주 방문했다. 아빠랑 같이 반찬을 사들고 한우를 사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할머니를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뵀는데, 할머니는 늘 할아버지를 어서 따라가야겠다고 말하셨다. 나를 보고는 늘 다른 사촌의 이름을 불렀다. 엄마랑 붙어있는 모습을 보면 내가 엄마를 괴롭히는 못된 아이인 것 마냥 혼을 내기도 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가부장적 집안에 막내딸의 장녀인, 손자손녀만 10명이 넘어가는 집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살뜰히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고, 할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의 복실거리던 머리가 짧게 깎이고, 염색되지 않은 흰머리가 자라나고, 환자복을 입은 할머니였어도 코로나였어도. 엄마는 한 달에 한번 이상은 아빠랑 할머니를 보러 갔다. 여전히 보러 갈 때마다 할아버지 얘기를 하셨다고 한다. 한 번은 할아버지가 꿈에 나왔다고, 나도 이제 가야 할 거 같다고 말씀하셨단다. 엄마는 조용히 내게 말했다.
"이런 말을 하긴 뭐 하지만, 딸, 엄마를 슬슬 보내드려도 될 거 같아"
엄마말에 조용히 응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온 지 1년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5년이 더 지나고 할머니가 작고하셨다. 5년간의 할머니는 너무도 할아버지를 그리워했다. 할머니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할아버지에게 가셨다. 그 사이에 첫째 외삼촌이 암으로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할머니에게 그 사실을 비밀로 하자고 말했다.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첫째 외삼촌의 부고을 알지 못했으나, 직감으론 알고 계신 것 같았다.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꿨다고, 첫째 외삼촌은 어떠냐고 가족에게 물어봤다. 가족들은 아들가족 따라 서울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아들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지만.
평안하게 그곳에서 할아버지와 첫째 외삼촌을 만나셨겠지? 잘 지내시길, 평안하시길, 고통이 없으시길 바랄 뿐이다.
--
잰이의 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돌아가셨다. 부고장을 받고 아이고, 내일 갈게 기다려 잰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말한 다음날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내가 또 부고를 보냈다. 서로의 장례식장에서 서로의 걱정을 했다. 할머니는 요양병원에서 할아버지와 같은 병명인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오랜만에 본 사촌들은 그새 또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2쌍이 결혼하고, 3쌍이 더 결혼할 예정이었다. 혼사를 알리는 사촌들, 그리고 내 조카라 인사하는 아이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가족끼리 볼 일이 없어서 인지. 안 그래도 안 봤던 가족들을 또 보려니 정말 생소하고 어색했다. 피가 이어진 것 빼곤 뭐가 있는 거지? 내게 가족은, 사촌은 길 가다 어깨에 부딪혀 사과하는 사람보다 더 어색한 관계인듯하다. 성인이 돼서는 정말 안 봐서 그런가. 나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이 돼서야 외할머니를 할머니라고 불러도 된다는 걸 알았다. 부를 일이 없었고, 있어도 그저 외할머니라고 불렀었는데 엄마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거야라고 말해줬다. 이로써 엄마아빠의 엄마아빠는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엄마아빠는 어떤 기분일까.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곤 할까? 그런 엄마 아빠가 궁금해서 가끔은 넌지시 물어본다.
"아빠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
"할아버지는 한자에 능하셨어. 아주 똑똑하고 강제징용도 가셨었고, 독립운동도 하셨어."
"그랬구나"
라고 하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연인인 수는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내가 쏙 빼닮았다고 했다. 아빠는 무슨 헛소리냐고 말했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은 종종 내게서 엄마아빠의 엄마아빠를 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눈이 펑펑 내리던 날 12월 또다시 부고가 날아왔다. 나의 선생님 중 한 분이었다. 열심히 날 가르쳐주고, 조언을 해주던, 불과 두 달 전까지 매일 봤던 사이였는데, 그런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송년회 진행으로 정신이 없던 그 상황이 아득히 멀어졌다. 한 청년이던, 누군가의 오랜 연인이던, 누군가의 선생님이던 그분의 사인이 홀로 죽음을 택한 것이라는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은 알려지기보다, 묻히기를 택한 듯 보였다. 쉬쉬하며 정말 가까운 주변인만 그 사유를 아는 듯했다.
누군가 그에 대해 아주 나쁜 말을 했다. 그 나쁜 말 덕에 인류애를 좀 잃었고, 신뢰를 잃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 한편에 스승님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 또한 추모하겠다. 어떤 일이 있었던 선생님이었다. 어떤 고통이 있었던 부디 이제는 평안하시길.
노자는 죽음은 도(道)로 돌아가는 과정이라 했다. 이에, 장자는 아내의 장례식에서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기운만 있던 것에 형태가 생기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다시 도의 흐름 속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슬픔도 있었으나 생각해 보니 자연의 섭리이기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 그렇다. 장자의 말에 따르면 죽음은 자연의 섭리이다. 그래도 문뜩 도의 흐름의 로 돌아간 분들이 생각나는 이유는 형체가 사라진 그들과 겪었던 시간과 순간, 그 기억들이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