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팬 미팅이 있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하지 않게.
모 여중에 근무할 때 인기가 하늘을 치솟았다고 자뻑성 대사를 날리던 그의 얘기가 그다지 믿음이 가진 않았다. 내 경험으로 봐서 여학생들에게 총각 선생님은 입이 험하거나 결정적 하자가 없는 한 웬만하면 인기가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한때 날리던 그의 인기란 것이 실체도, 증명할 방법도 없어 내게는 와닿지 않았다.
8년 전. 그에게 인기 있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조차 희미할 무렵 증인이 나타났다. 같은 교무실의 선배 교사와 얘길 나누다 우연히 그녀와 아직도 가끔 자뻑 증세가 있는 남편이 모여중에 함께 근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학교에 근무하면서 남편과 같은 시기에 근무했던 사람이 나와, 나랑 근무한 후에 남편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경우는 여러 차례 있었다.
그녀와 나는 스스럼없이 말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그녀의 말로는 당시 남편의 책상 위에는 꽃이며 편지가 늘 놓여 있었고, 쉬는 시간에는 질문을 빙자한 여학생들이 북적댔다고 했다. 그 시기의 남편 사진이 너무 촌스러워 다소 의심은 가지만 함께 근무했던 동료 교사의 말이니 어쩔 수 없이 인정하기로 했다. 그의 말로는 그때 인기에 치어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고 이후 여중을 피해 다녔다고 했다. 별 관심은 없었지만 삐칠까 봐 두어 번 우쭈쭈 해 준 후 또 잊고 살았다.
며칠 전. 매달 열리는 시 읽기 모임을 우리 집에서 했다. 집구경도 할 겸 진작에 하자는 걸 작전상 미뤘다. 겨울 시골집은 앙상하게 벗은 나뭇가지를 보는 일도 을씨년스럽고 바람도 매섭다. 두 번 할 것도 아니니 이왕이면 예쁜 집을 보여 주고 싶었다. 어느덧 잔디에도 물이 올라 파릇파릇해지고 노란 붓꽃이며 송엽국과 마가렛으로 손님맞이 체면치레는 되었다.
외조의 왕까지는 아니지만 남편은 나름대로 전날부터 고군분투했다. 집 안 밖 청소는 물론 잔디도 다듬었다. 당일 아침은 평소보다 서둘러 반려견 두강이 산책도 마쳤다. 야외 테이블은 파리가 미끄러졌고, 그 위에 쳐둔 쨍하게 빨간 파라솔이 개선장군처럼 돋보였다. 심지어 ‘알아서~’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점심 준비에 여념 없는 나를 대신해 시를 읽을 썬룸도 알아서 척척 정리했다.
시모임은 10시 반이었다. 남편은 서둘러 집을 벗어났다. 다른 분들이 편안하게 계시라고 이번에도 알아서 비켜 주었다. 아침도 먹지 않고 쫓겨나다시피 가는 그의 뒷모습이 안쓰럽진 않았다. 그에겐 나름의 계획이 있었으니까. 근처에 나보다 더 살뜰하게 아침을 챙겨 줄 지인의 브런치카페가 있다.
8명이 참석한 시모임은 순조롭게 끝나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감자탕 대리점을 하시는 회원분의 협찬으로 메인 메뉴 걱정을 덜었다. 며칠 전 담가둔 깍두기와 부추김치에 나물 두어 가지와 김치전, 밑반찬으로 상을 차렸다. 하하 호호 수다 떨며 흥겹게 식사를 마치고 일정이 바쁘신 분들은 먼저 가시고 뒷정리를 도와주던 3분이 남았다. 시 모임의 리더이자 가장 연장자인 H는 남편의 이름이 낯이 익다며 사진을 보여 달라했다. 그녀가 알던 사람이 맞았다. 그녀와 남편은 모여중에 함께 근무했다. H와 나는 ‘이런 인연이 있네’하며 마주 보고 웃었다.
그녀와 내가 식탁을 정리하던 사이 40대의 한과 양이 거실의 장식장을 보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어머 어머 000 선생님이야. 어쩜 좋아.” 글쎄. 그녀 둘 다 모 여중 출신으로 남편의 팬이었단다. 둘은 여중생 마냥 손을 맞잡고 어쩔 줄 몰라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다시 양이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당시 남편과 같이 근무했고 그분의 성함이 양##이라고. 어럽쇼. 양의 아버지와 나도 같은 학교에 근무한 사이였다. 더구나 내가 속한 교무부의 부장이었다. 인화단결을 중시하는 인품 좋은 분이 아쉽게도 교장 승진을 앞두고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었다. 한데 그분이 바로 양의 아버지셨다니.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양의 아들은 남편이 마지막 근무했던 학교의 제자였다. 말하다 보니 복잡해도 너~무 복잡하다. 한데 읽는 분들은 어떠실까.
독자분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정리 들어갑니다.
1) 양과 나는 시 읽기 모임 회원
2) 양의 아버지와 나, 양의 아버지와 남편은 각각 같은 학교에 근무
3) 양과 양의 아들은 남편의 제자임
4) H는 남편의 동료, 나와 같은 모임 회원
5) 한은 남편의 제자, 나와 같은 모임 회원
이쯤 되면 남편을 아니 부를 수가 없다. 근처 카페에 피신 가 있던 그에게 급히 연락했다. 서둘러 돌아온 그와 두 제자의 즉석 팬 미팅이 이루어졌다. 인기 많았었단 말이 사실임을 팬의 입에서 직접 들었다. H까지 합세하여 네 사람은 30년 전의 총각 선생과 여중생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났다. 추억은 기억해서 아름답고 기억된 아름다움은 추억이 되어 다시 찾아온 하루였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또 다른 추억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