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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희 Jun 27. 2023

고양이가 싫다 1

 고양이가 싫다. 지지리 말 안 듣는 녀석들 따위 안중에 두고 싶지 않다. 내 집 마당에 들여 정주는 일 따위 부질없다. 비가 오거나 바람 부는 날, 녀석들의 끼니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나도 보고 싶지 않다. 한겨울 몰아치는 바람과 코끝이 쌩한 추위에 잠자리는 어쩌는지, 더위를 피할 그늘은 있는지 더 이상 애태우며 발 동동 구르기 싫다. 장마가 시작되어 오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 어디서 비는 피하고 있는지, 밥을 굶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테다. 피 흘리며 찢긴 상처도, 죽어가는 꼴도 다 보기 싫다.     


 고양이는 도도하고 고집이 세서 돌보는 인간을 길들인다는 얘기를 들었다. 고양이 키우는 지인이나 유튜브에서 고양이를 주인님으로, 보호자를 집사라 부른다고 들었다. 그런 얘길 접할 때마다 ‘어지간히 예뻐하나 보다. 뭘 그렇게 까지’라 여겼다. 마당 고양이 세 녀석은 어느 날 슬그머니 나타나 녀석들을 만만하게 보는 인간 둘을 길들여 버렸다.      


 가끔 얼굴을 내미는 녀석들이 귀여워 멸치 몇 마리나 생선뼈를 주는 일에서 시작했다. 녀석들은 점점 자주 얼굴을 비추며 사람이 먹다 남긴 짠 음식을 주는 일을 미안하게 만들었다. 어릴 적 시골 동네에서 키우던 개나 고양이들은 대부분 사람이 먹다 남기거나 밥상 위의 음식을 덜어서 먹였다. 그때는 당연하다 여겼다. 자극적이거나 몸에 해롭다고 생각조차 못했으니까.


반려동물 키우는 가정이 많아지면서 TV나 인터넷, 유튜브를 통해 그들에게 해로운 음식, 절대 먹여서는 안 되는 식품들을 알게 됐다. 어쩌다 한 번이면 몰라도 계속 먹다 남긴 음식을 줄 순 없었다. 사료를 사고 간식을 준비했다. 가끔 오면 배불리 먹이고 싶은 게 다였다. 이름 없는 낯선 고양이들은 소리 없는 침입자처럼 내 마음에 스며들었다.  

    

 녀석들에게 본격적으로 밥을 주기 시작한 건 작년 봄부터다. 이 년 전 가을. 마당에 가끔 놀러 오는 길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다. 둘 다 수컷이다. 한 아이는 머리, 등과 꼬리 부분은 노란색, 얼굴 아래부터 배와 네 발은 흰색이다. 또 한 녀석은 전체적으로 짙은 회색빛으로 얼굴이 약간 험상궂게 생겼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매력적이었다. 노란 무늬 녀석에게 두랑이, 회색빛깔 녀석에겐 두식이라고 이름 지었다. 얼마 후, 두랑은 암컷 고양이 두리를 데리고 왔다. 두랑, 두식, 두리라는 이름은 반려견 두강의 이름과 같은 돌림자로 지었다. 가족이 된 것 같았다.     


 두랑과 두식은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밥때는 건들지 않았다. 가끔 밤이 되면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났다. 아침이면 둘 중 누군가의 얼굴에 생채기가 나거나 다리에 물린 자국이 보였다. 길고양이 세계의 서열 다툼이라 사람이 끼어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어쨌든 세 녀석은 올 초까지는 별 무리 없이 지냈다. 세 녀석이 밥그릇을 나란히 두고 밥 먹는 모습을 볼 땐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 보면 절로 배부른 어미 같은 심정이었다. 2월이 되자 두랑이 슬그머니 집을 나갔다. 종족 번식을 위한 본능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녀석은 며칠씩 싸돌아 다니다가 초췌한 몰골로 나타나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두랑이 집을 비우는 주기가 점차 길어졌다. 그러더니 다시 나타났다. 예전과 달랐다. 집 근처에 머물면서 부르면 언제나 달려오던 녀석이었는데. 마당에서 한참을 놀다 가던 녀석이 잽싸게 밥만 먹고 사라졌다. 겨울까지만 해도 뚱땡이라고 놀리던 녀석은 브이라인도 모자라 얼굴이 반쪽이 되어 나타났다. 배가 땅에 닿을 듯한 모습은 온 데 간데없고 뼈가 도드라졌다. 윤기가 잘잘 흐르던 털은 뭉텅이로 빠지고 있었다. 얼굴은 상처 투성이에 다리는 물려서 살점이 움푹 파여 나갔다. 집에 있으면 다치지 않을 것 같아 잡고 싶었지만 내 욕심이었다. 사람 손을 타서 만져달라고도 하고 배도 보이며 친밀감을 드러내는 녀석이지만 갇히는 건 죽기보다 싫어했다.     

 

 태풍 부는 날 집안에 들이려다 실패했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더니 기어코 집을 나가 노숙자 신세로 떠돌고 있다. 집 근처에 머물면 두리처럼 이웃집 하우스 안에  자면 될 테고 끼니 걱정도 없다. 무엇보다 다치지도 않을 텐데. 떠도는 이유를 모르니 안타깝기만 했다.   

   

 길냥이를 돌보는 일은 실내에서 소형견을 키웠던 경험이나 마당에서 반려견을 키우는 일과는 달랐다. 반려견은 집에 소속되어 있다. 집안이든 실외든 사람의 말에 반응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마당에 사는 두강도 산책이나 운동 시간 외에는 제 구역안에서 살고 있다. 밥과 간식을 챙기고 사랑을 주는 일을 때맞춰 할 수 있다. 비, 바람, 추위에 맞춤으로 돌보는 일이 가능하다.  길냥이는 달랐다. 내 시간, 상황이 아니라 고양이에게 맞추어야 했다. 두리는 일정한 시간에 부르면 나타나지만 두랑이와 두식이는 달랐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식탁 창가에서 입으로 밥을 떠 넣으면서 눈은 창밖을 응시했다. 밥 먹다가도 커피 마시다가도 고양이 울음소리에 반응했다. 설거지하다가도 장갑을 벗어던졌다. 혹시라도 늦게 나가면 녀석들이 실망하고 금세 돌아서 가버릴까 봐, 밥을 굶게 될까 봐 나는 늘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녀석들을 돌보고 길들인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녀석들이 날 길들였다.


그렇게 길들여 놓고 두식은 작은 별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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