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할 거야?”
줌바 강습을 다녀오자 남편이 물었다. 불쾌했다. 불순한 의도가 엿보였다. 나의 저질 체력과 남부끄러울 만큼 둔한 운동신경, 쥐꼬리보다 연약한 의지를 염두에 두고 던진 말이렸다. 그의 눈동자에 ‘네가 과연’이라는 글자가 비친 것은 나의 착각인가.
M과 K와 함께 강당 문을 밀고 들어섰다. 먼저 와 있던 회원들이 “어서 와요”하며 반겼다. 강사님이 오기 전에 삼삼오오 모여 얘기꽃을 피우는 중이었다. 이곳에선 본인보다 나이가 많으면 다들 언니라고 부른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언니라고 하는 것이 어색하다. 언니가 넷이나 되는데도 친· 인척 외에는 좀체 언니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지인 대부분이 교사라 누구에게나 선생님이라 호칭하는 것이 입에 익었다.
퇴직 후 사회에 나오자 상황이 달라졌다. 나이가 같거나 적은 경우는 00 씨라고 부르면 되지만 손위 사람에게는 언니란 호칭 말고는 마땅한 말이 없다. 우리 동네 입주민 여자들 중 나는 나이가 제일 많다. 나와 동갑 한 명을 제외하곤. 그녀들에게 나는 1호 집 언니로 불린다. 어떤 집단에서 나이가 많다는 건 부담스럽다. 학교에서도 그랬다. 나잇값이라는 게 있다. 입은 다물고 귀나 지갑은 활짝 열라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줌바 회원 중에서 나는 젊은 축에 속한다. 눈치껏 파악한 걸로는 나와 나이가 같은 회원이 셋, 아래가 넷, 나머지는 모두 나이가 많다. 마음이 편하다. 손위의 그녀들은 신입에게 다정다감하고 환한 웃음으로 다가왔다. 배려심을 아끼지 않는다. 어떤 분은 날 보고 심지어 귀엽다고 했다. 웃는 게 귀엽단다. 눈이 작은 나는 웃을 때 더더욱 초승달처럼 가늘어진다. 그녀들 웃음과 말투에서 사람의 온기가 전해졌다.
반장님은 내게 쉬엄쉬엄하라고,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내 자리의 오른쪽에 활달하고 우스개 소리로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분이 있다. 살며시 다가와 육 개월 정도는 누구나 다 힘들었다고, 발동작부터 따라 하라고 속삭였다. ‘아. 이 사람들 뭐지?’ 낯선 사람들과 뭔가를 함께 배운다는 것도 익숙하지 않지만 스스럼없이 친절하게 다가오는 사람들 역시 익숙지 않다. 함께 뭔가를 하다가 친해지는 게 아니라 일단 친밀감부터 다져야 뭐든지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이분들이 심상치 않다. 혹시 줌바 회원들은 인성 면접을 거치고 들어오는 건가. 아니면 들어오면서 분위기에 전염되는 걸까. 나 역시 몰래카메라로 면접을 본 건 아닐까. 쓸데없는 상상을 해 봤다.
오래전 일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교사 소집일이었다. 교무실에서 회의가 열렸다. 전근 온 젊은 여선생이 일찍 도착하여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나는 얼른 내 옆자리에 보조 의자를 놓고 앉기를 권했다. 2월 말. 늦추위는 학교를 옮긴 사람에게 서먹함 못지않은 냉기를 품어 내고 있었다. 따뜻한 차 한잔을 권했다. 낯선 교무실, 낯선 사람들과 분위기는 처음 온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든다. 다행히 아는 얼굴이라도 있으면 좀 낫다.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공간에서 존재감은커녕 궈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뻘쭘 그 자체다. 나도 여러 차례 겪어 봤기에 새로 오신 선생님들께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려고 애썼다. 그녀. K는 체육교사였다. K는 체육관에 딸린 교무실에 근무하다 보니 그 후로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어쩌다 회의시간이나 복도에서 마주치면 말수가 별로 없던 그녀는 내게 미소 지으며 듣기 좋은 서울말로 인사를 건넸다.
이듬해 이월 말,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짐을 싸느라 분주한 내게 K가 찾아와 작은 선물을 건넸다. 처음 왔을 때 따뜻한 차 한잔과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을 잊을 수 없다고 살짝 눈물을 비췄다. 또 다른 학교에서 만난 M은 내게 받은 작은 친절을 그 후 새로 온 선생님에게 갚고 있다고 말했다. 부담 없이 베푸는 작은 마음이 상대방에게 닿아 좋은 본이 되었다니 내심 기뻤다. 마음은 때로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살포시 누군가의 어깨에 내려앉기도 하고, 작은 냇물처럼 소리 없이 흐르는 것 같다.
줌바댄스의 회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이 건네는 한마디 한마디가 겨울 찬 바람 속 말간 햇살처럼 느껴졌다. 삶의 연륜에서 묻어나는 너그러움일까. 인정과 배려로 소소한 관계를 잘 쌓으면 서로가 행복해진다는 지혜일까. 왠지 줌바의 늪에 빠져 버릴 것 같다. 자연스럽게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일단 이름부터 외우자. 멋쟁이 반장 정*언니, 여린 몸으로 동작은 엄청 크게 하는 *선 언니, 웃음꽃 만발 양*언니, 여장부 같은 광*언니, 공주님 같은 남*언니, 온화하면서 기품 있는 경*언니. 그 외 민* 혜* 경* 정*.
이런, 외우라는 발동작 대신 이름을 다 외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