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희 Aug 28. 2023

오지랖녀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낯선 전화번호를 경계하라

발등을 찍었다. 믿는 도끼에 찍힌 건 아니다. 내 발등을 내가 찍었다. 그것도 야무지게. 간밤에 잠을 설친 탓에 머리가 멍하다.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 못 든 게 아니라 오지랖이 넓어 벌어진 일에 대한 반성으로.


며칠 전. 벗님 둘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둘 다 학교에 근무하고 있어 방학이 되기만 손꼽아 기다렸다. 몇 달만의 만남이라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영이 집까지 데려다준다 했다.  2프로 부족한 얘기를 차 안에서 마저 하자며. 전화로 한참 수다를 떨다 ‘자세한 얘기는 내일 만나서 하자’라는 것처럼 우리의 수다는 차 안에서 이어졌다. 영이 부족하다는  대화는 택시를 타야 하는 나의 귀갓길을 배려한 마음씀이었다.

    

차 안에서 선의 우스갯소리에 깔깔대는 중 전화가 왔다. 평소 낯선 전화는 잘 받지 않는다. 하지만 여행 예약도 해두었고, 새 강좌도 신청해 둔 터라 평소와 달리 냉큼 받았다. 전화 속의 남자가 이름을 밝혔다. 구 년 전 함께 근무했던 K선생이었다. 그는 우리 집과 가까운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와는 동 학년 담임을 함께 했다. 진중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짓던 그의 낯익은 목소리가 반가웠다. K선생은 다른 사람을 통해 내가 이른 퇴직을 하고 탱자탱자 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강사를 제안받았다. 8월 말로 정년퇴직하시는 선생님을 대신할 기간제 교사가 필요하다며. 퇴직하시는 분은 같은 학교에서 4년을 근무하고 같은 부서에도 2년을 있었다. 요즘 강사 구하기가 어렵단다. 교육청 인력풀에 3번째 공고를 낸다고 했다. 2학기에는 임용고시를 앞두고 있어 더욱 그렇다. 단칼에 거절하기는 뭣해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오죽하면 그만둔 지 3년이 지난 내게 연락했을까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일주일 시간강사라면 모를까 육 개월 기간제 교사를 하기에는 걸리는 일이 많았다. 9월 초에 배우고 싶었던 강좌가 어렵게 개설되어 이미 수강료를 입금했다. 10월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스페인 여행을 예약하고 계약금도 걸었다. 일 년 반을 다닌 어반스케치도 있고 이제 막 적응기에 들어선 줌바는 또 어쩌고. 호기롭게 에피소드를 매거진으로 엮겠다 했는데 개점휴업이 될 판이다. 출퇴근도 문제다. 집에 차는 한 대뿐이고, 버스는 시간 맞추기 어렵다. 이쯤 되면 돌아볼 것 없이 절대 하지 않겠노라 싹을 잘랐어야 했다. 나 아니라도 어떻게든 해결될 일이다. 그런데 내 안에 수년 동안 잠자던 오지랖이 독사대가리처럼 고개를 쳐들고 혀를 날름거렸다.      



 수년 전 일이다. 옆자리에 앉았던 김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담임을 할 것 같다고. 그녀는 나보다 서너 살 아래지만 아이는 많이 어려 그 해 초등학교에 입학 예정이었다. 집도 멀었다. 아이 입학에 맞추어 일부러 휴직까지 하는 엄마들도 있는데 안타까웠다. 그렇다고 내가 하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 년간 담임을 하고 나도 지쳐있었다. 새 학기가 되어 그녀는 3층, 나는 4충 교무실로 이동했다. 김 선생은 1학년 여학생 반 담임이 되었다. 그 당시는 7시 50부터 아침 자율학습이 시작되었다. 새 학기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담임이 교실에 들어가 있던 시기였다. 그녀의 사정을 뻔히 아는 처지라 그냥 있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녀에게 3,4월 동안 학급이 안정될 때까지 내가 교실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오지랖의 시동이 제대로 걸렸다.

     

개학 둘째 날부터 7시 반까지 출근하여 커피 한잔 들고 아침마다 1층에 있는 김 선생의 학급에 들어갔다. 나는 그 해 2학년 수업을 맡았다. 부담임도 아니고, 수업도 들어오지 않는 선생이 날마다 아침부터 조용히 하라고 눈을 흘기고 청소를 시켰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마귀할멈 같았을 것이다. 심지어 교감 선생님은 내게 옆반까지 지도하라고 했다. 어찌나 당연하게 말하는지 혹시 내가 진짜 담임인 줄 아나 할 정도로. 옆반 담임 역시 초등학생 학부모여서 일찍 오기가 힘들었다. ‘그래, 이왕 하는 것’ 싶어 조심스레 옆 반 양 선생에게 의중을 물었더니 그래 주면 너무 고맙겠다고 말했다. 오지랖이 새끼까지 친 셈이다. 학생들이 현장 학습 가는 날을 제외하곤 하루도 빠지지 않고 7시 반까지 출근하여 교실로 갔다. 3,4월만 하겠다던 나의 결심은 간데없이 결국 다음 해 2월 종업식 날까지 오지랖을 떨었다.   

  

평소 나의 이런 병통을 아는지라 요 몇 년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오지랖병을 잘 다스려왔다. 이번에도 그랬어야 했다. 세상은 나 없이도 잘 굴러간다는 걸 깜빡했다. 교감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거절하기 어려웠다. 나 역시 허리가 아파 한 달 병가를 낼 때 강사 구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교사였던 남편은 학교의 사정을 뻔히 아는 터라 협조를 자청했다. 아침에는 시간에 쫓기니 출근도 시켜 준단다. 그나마 집과 가까워서 다행이다. 사실 집과 멀었으면 애초에 생각도 안 했겠지만. 반려견 두강이 산책을 시키고 오면 텃밭도 관리하고 마당도 돌보는 의 아침 시간도 빠듯하다. 본인이 해야 할 집안일은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도 응원해 주고 선선히 협조까지 하겠다는 남편을 보니 아무래도 이상하다. 곧 날개가 돋으려는 모양이다.

     

기간제 채용에 따른 서류제출을 안내받았다. 일곱 가지나 되었다. 서류 중에 공무원 채용 신체 검사서와 마약류 중독 검사가 있다. 뉴스에서나 듣던 마약반응 검사를 다 받아보다니. 검사는 소변검사로 간단했지만 특정 병원을 가야 하고 서류 작성 등의 과정은 복잡했다. 주민자치센터에 들러 주민등록등본과 최종학력 증명서를 신청했다. 합격증을 받아 든 신규교사나 일자리를 찾던 강사라면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서류를 준비하러 다닐까 싶었다. 서류를 제출하면 9월 1일부터 내년 2월 말까지 1과 2학년 수업을 맡게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사라는 직업은, 특히 여학생들에게 선호도가 높았다. 하지만 교권은 끝없이 추락하고 각종 민원에 시달리다 보니 교사의 권위는 간데없다. 요 근래 안타깝고 마음 아픈 기사들을 보니 덜컥 겁이 난다. 오랜만에 만나는 학생들과 코로나 전과 달라진 학교 분위기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두렵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오지랖이 있던 자리를 채우고 있다. 역시 낯선 번호의 전화는 받지 말았어야 했다. 오지랖 따윈 제발 넣어 둬.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도 브런치를 먹고 읽고 씁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