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처럼 가꾸는 소중한 인연

by 도희


토요일.

부부 동반 저녁 모임이 있어 오랜만에 때 빼고 광낸다.

흰머리가 허옇게 보여 '촌 할매' 같다는 말을 열흘 전부터 들어왔지만 염색은 참 귀찮은 일이다. 내일은 제자 결혼식도 가야 하니 마음먹고 염색을 한다. 귀차니즘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던 집순이는 어쩔 수 없이 팔을 걷어붙인다. 평상시처럼 염색약과 비닐장갑을 준비하여 능숙한 솜씨로 끝내고 나니 거울 속엔 '촌 아지매'가 서 있다.


일 년 만에 만나서 확 늙었다는 소릴 듣고 싶진 않아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코로나 이후 잘 바르지 않던 립스틱까지 더해 나름 만남에 대한 예의를 갖춰본다.

남편이 옆에서 ‘으흐흐’ 하고 웃으며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나?’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개그를 해서 주먹을 불끈 쥐게 한다.


오늘 참석하는 부부동반 모임은 ‘**회’라는 이름의 30년이 넘는 나름 역사가 긴 모임이다. 남편이 결혼 전 근무하던 학교에 이른바 처녀. 총각들의 모임 ‘처총회’가 있었다.

내가 교사로 임용될 당시 울산은 인구가 많이 늘면서 신규교사나 연차가 오래되지 않은 사람도 한꺼번에 울산으로 발령이 많이 났다. 웬만한 규모의 학교에서는 청춘 남녀들이 많았고 그들은 대부분 울산이 고향이 아니었다. 객지 생활의 외로움도 덜고 신규 교사의 애환도 나눌 겸 두어 달에 한 번씩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운동도 같이 했다.

어디 청춘 남녀들이 밥만 먹고 말겠는가? 술잔 속에 정을 담고, 찻잔 속에 우정을 담다 보니 손에 손도 잡고, 학교마다 몇 쌍은 팔짱을 끼고 예식장에도 들어가게 된다.


**회의 출발은 처총회에서 시작했지만 그중 마음 맞는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으로 8명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회원 중 첫 번째로 남편이 오다가다 눈 맞은 나

(타 학교 근무)와 제일 먼저 결혼하고. 모임 내에서 두 쌍의 부부가 탄생하여 **회는 본연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나머지 회원들도 비슷비슷한 시기에 결혼하여 **회는 남자 정회원 6명에 준회원인 배우자까지 12명이 되었고, 우리는 모두 부부 교사였다.


가족 모임의 성격을 띠던 **회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사정이 바뀌었다.

여 회원들은 3~40대엔 아이들 뒷바라지에, 주말이면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고된 세월을 보냈고, 게다가 한 쌍은 포항으로, 또 한 쌍은 창원으로 옮기게 되어 자연스레 남자들만의 모임으로 십오 년을 훌쩍 넘겼다.


여 회원들은 세월이 흐르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기자 옛사람도 그립고, 궁금하여 자연스레 모임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일 년에 한 번은 부부동반 모임을 갖게 되었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멀리서 찾아오신 분, 몸이 아픈 분까지 모두 참석하여 정말 오랜만에 12명의 완전체가 되었다. 매월 적지 않은 회비를 낸 덕분에 총무님이 소고기를 맘껏 먹으라 하니 입이 즐겁다. 실컷 먹고도 고기와 버섯이 한 팩씩 남았다. 사다리를 탈까 하다가 새롭게 출발한 부부동반 모임에 처음 나온 막내 회원에게 주기로 한다.

"소고기 값 해야 돼" 다음 모임에도

꼭 나오라는 격려인지, 협박인지 모를 멘트를 다들 한 마디씩 보탠다.

즐거운 식사와 찻집에서의 회포 풀기로도 모자라 1월 중순 거제도로 1박 2일의 짧은 여행 일정을 잡았다.


결혼 전 같은 학교에서 직장 동료로 만나 겨우 4년을 근무했을 뿐이다. 그런데 각자 결혼하여 배우자까지 모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타 지역으로 전근 간 분까지 30년이 넘도록 아무도 이탈하지 않고 이어오는 인연의 끈이 튼튼한 동아줄 같다.

인연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라고 되어 있다.

'처음 만남은 하늘이 만들어 주는 인연이고, 그다음 만남은 인간이 만들어 가는 인연'이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만남과 관계가 단순히 이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좋은 인연, 좋은 관계가 되는 것은 온전히 사람의 몫이다.

좋은 관계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법은 없다,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고, 관계에 대한 책임이 필요하다.


인연을 이어주는 가장 강력한 힘은 아마 존중과 관심, 배려가 아닐까 한다.

내가 그 자리에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아무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면 결국은 소외감을 느껴 그 끈을 놓아 버릴 것이다.


관계란 양방향이다. 그러니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다.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 주려는 노력이 있어야 따뜻하고 아름다운 관계 맺기가 지속될 것 같다.

나와 남편의 오랜 모임들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회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성과 노력들의 결과다. 시간의 흐름 속에 잊히지 않는 소중한 인연이 있어 내 삶이 지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 모임에 나와 주신 그분들이 참 고맙고, 자랑스럽다.

나의 주변에 한결같은 마음을 가진 그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감사한 일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혹시나에 대한 두 가지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