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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엘에게 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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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등 Apr 03. 2024

남지철교 위에서

남지철교 위에서



능가사를 가려면 남지 철교를 건너야 합니다.

나는 가끔 노을이 질 때 이 철교를 걸어요.

철교 폭은 크게 다섯 걸음 정도 되지요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한적한 곳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강은 조용하고 물길 따라 벼랑이 그림처럼 펼쳐 있습니다.

작은 절이 그 벼랑 위에 강을 등지고 있지요

가끔 철교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곤 하는데요.

해는 빨리 지고 강은 더디 붉다가 어두워집니다.

어둠이 오면 강과 나와 철교 사이에

능가사 불빛이 거리를 가늠하여 줄 뿐입니다


L


<1950년 9월 8일 철교는 폭파되었다. 사태의 잘못 판단으로 미군 제트전투기(F-82)가 500파운드의 폭탄을 투하 폭격하여 중앙부 25m를 파괴했다. 이 철교는 1953년에 복구되었다.>


한 때 철교는 폭파되었고 

그 때나 지금이나 강은 말이 없고 퇴적된 한으로 맑지가 못합니다.

그 사람도 여기서 그렇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버린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무엇을 버리고 싶어 했을까요.


L


그는 마지막으로 노을을 보았을 것이고

강 위로 노을이 만들어 놓은 붉은 길을 보았을 겁니다.

길은 해와 나를 정면으로 줄을 긋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는 갑자기 철교 위에서 어리둥절했을지도 모릅니다.

강은 흐르던가요?

놀랍게도 엘,

더 이상 흐르지 않고 멈추어 버리는 시간을 보게 됩니다.

강과 어둠이 한 덩어리가 되는 순간

흐르지 않았어요! 

그는 이 순간을 보았던 것일까요?

영원으로 회귀, 그리고 멈춤

나조차 지독하게 강바닥으로 가라앉고 싶은 갈망에 시달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생각해 낸 것은 정말 다행이었어요.

나는 철교 위에 남았습니다.


L


흐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은 더러 빨리 흐르거나 멈추어 버리기를 꿈을 꿉니다.

그러나

숱한 이야기를 삼키고도 아침이 되면

멈추었다고 생각한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어요.

아침이 되어서야 그가 해명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버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고

잃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라고

멈춘다면 당신에게 영원할 줄 알았다고

그는 온몸이 잔비늘 되어 말합니다.


L


삶이란 흐름에 보폭을 맞추는 일입니다

실연과 상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보폭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철길은 보폭을 맞추기 위해서 놓인 것입니다.

철교 아래로 강이 흐르고

흐르지 않는 강은 없다는 것을

대답으로 남깁니다.

능가사 불빛이 그 강에 멈추어 있다고 해도

나는 이제 그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나의 보폭으로 아침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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