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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엘에게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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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등 Apr 10. 2024

그녀와 막걸리 2

L ,


T교수가 말했어요

슬픔에도 앞뒤가 있다고

정말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피식 웃더군요.

웃기지 말라고 해

진짜 앞뒤가 있다면

뒤에서 앞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앞에서 뒤를 볼 수 있어야 해.

슬픔이 슬픔을 알아보지 못하면 반칙이야.

그런데 말이야, 

슬픔은 마주 보면 슬그머니 사라지거든.

     

L ,


나는

슬픔의 앞뒤 따위에 관심 없어요.

젓가락 쪼개서 그녀 노래에 장단을 맞췄어요.

음정 박자 엉망이긴 그녀나 나나 별반 다르지 않아요.

나름 열심히 잘하고 있었는데, 제법 장단을 잘 맞추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노래하다 말고 나를 타박했어요.

잘하면 울겠다. 우는 건 반칙이야

그러니 네가 사라

슬픔의 앞뒤만큼 그 두께만큼 네가 사라

막걸리도 사고 빈대떡도 사라

슬픔의 쪼가리도 못 되는 내가 마셔줄게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어요.

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L ,


슬픔의 앞뒤가 빈대떡 앞면일까 뒷면일까 생각했어요.

창밖에 내리던 비가

막걸리 사발에도 가득 내렸어요.

사발로 내리는 비는 돈을 내고 마셔야 해요

슬픔은 이런 것일까요?

그녀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아요. 잠이 들었거든요.

슬픔은 그녀의 등에서 거품처럼 일기 시작했어요.

그녀조차 만난 적 없다는 슬픔이

슬픔을 도닥거려요


나는 그녀의 등을 한동안 바라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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