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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엘에게 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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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등 Apr 13. 2024

사람의 등을 본 사람이라면

 



L



내 정든 토끼가 집을 나갔습니다.

토끼는 보이지 않는데

하늘은 저리 맑을 수 있는지

바람은 어찌 이리 처연하게 불 수 있는지


정은 함부로 줄 일이 아니라지만

왔다가 가는 일들이

전생의 업을 풀고 가는 것들이라지만

내 가슴 맺히면

또 누군가 풀어야 할 업을 짊어지고 가는 길이라는데

토끼는 무슨 업을 지고 집을 나섰을까요.


L


사람은 본시 쓸쓸하게 살아야 한다지요.

각기 하나의 별, 먼 빛들

간격만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길이라지요.


사람의 등을 본 사람이라면

더욱이 함부로 정을 받을 일이 아니라면서요

함부로 빛날 일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지요


사람만이 말을 삼킬 줄 안다고

말을 삼키는 사람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그리 다짐했건만

토끼도 말을 삼키고 있었던 줄을 몰랐습니다.


토끼가 사라지고 이틀째

바람조차 가벼이 받아들일 일이 아니라고

꽃조차 함부로 키울 일이 아니라고

눈을 둘 곳이 없는데

감나무에 앉은 새 한 마리

물끄러미 나를 보며 또 말을 삼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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