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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재 Feb 19. 2023

< 아버지의 해방일지 >를 읽고

인간과 사회주의자 

 

고등학교 때 ‘일반사회’ 과목 선생님이 ‘20대 때 사회주의에 미치지 않으면 정상이 아니고, 30대에도 사회주의에 미쳐있으면 비정상이다’라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50년이 지난 후에도 기억난다는 것은 그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인상이 깊었다’는 것으로 느껴진다. 나는 사회주의보다 공산주의가 더 기억에 남는 세대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저)는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겪었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 남다르게 와닿았다. 그리고 그 아버지와 성격이 닮은 딸의 서로 평행선인 모습이 글을 읽으면서 혼자 웃기도 하고 눈물이 핑 돌기도, 코가 찡하기도 했다. 


사회주의란 이념 아래, 모든 생활이 하나부터 열까지, ‘이념의 언행’으로 시작해서 ‘이념의 언행’으로 끝나는 하루의 연속이기도 하다. 똑똑하여서 고씨 집안의 자랑이었던 아버지가 이념을 받아들이면서부터는 고씨 집안의 몰락의 원흉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일생’을 그린 글이다.


장례식에서 영정 속의 아버지는 살아온 인생에 대한 ‘자긍심의 단호한 눈빛’으로 딸에게 다가온다. 부부도 이념으로 만났고, 딸도 이념으로 키웠고 키워졌다. 딸은 싫다고 해도, 싫어하면서도 체득하게 되는 아버지의 삶의 일부분으로 살아간다. 장례식에 참석한, 아버지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분들로부터도 듣게 되는, 아버지의 언제나 ‘인간을 신뢰하는 삶’에서 사람의 도리를 우선으로 하는 아버지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했지만, 감정적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나의 아버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내 부모는 어린 나를 일으켜주지 않았다. 누구 앞에서도 ‘힘들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울어본 적이 없다. ‘빨치산의 딸’의 본질로 받아들인다는 딸은 역시 아버지의 딸이다


부모 두 사람이 약해지는 대상 ‘민중’이란 단어로 엄마를 잡고, 딸이 ‘엄마보다 아빠가 좋다’는 말에 아내에게 으쓱하던 아버지, 사회주의자 아버지에게 ‘사상과 사람이 다름’을 느끼게 해 준 지주 자식인 ‘동지’와 ‘여호와의 증인’의 행동에서 ‘종교가 사상보다 한 질 위다’라고 한 아버지,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고,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운 아버지. 불태워지고 있는 화로에서 먼지로 돌아가는 중 엄마에게 듣는 ‘뻔한 남성의 욕망, 남자의 사정까지, 혁명가가 아닌 순간의 아버지’.


견디지 못하는 자가 들고일어나, 누구는 ‘싸움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참고 견디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믿는 내게 ‘아냐~ 넌 싸움꾼이었어’라고 한다면 반전인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영화 한 편’을 떠 올리면서 인물에 어울리는 배우는 누가 좋을까! 설경구? 영화감독이 되어 ‘레디 고’를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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