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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by 다이아

내가 보행기에 의지해서

어느 정도 걷는 시늉을 하기 시작하자

남편의 얼굴이 조금씩 피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남편은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지루했던 병원생활에 활력 커스텀마이징을 진행했다.


보드게임, 닌텐도, 과자, 과일 등

나를 기쁘고 재밌게 할 것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기 시작했다.


"물론 힘들긴 하지만...

우리 이렇게 오랜 시간 24시간 함께 있는 건 처음이잖아.

이 속에서도 알차고 행복하게 지내보자!"


정말로 사랑스럽고 대단한 내 남편!

덕분에 입원생활에 유흥 한 스푼이 더해졌다.


정말 많이했던 보드게임이에요 ㅎㅎㅎ


입원하면 심심하고 재미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주중에도 주말에도 쉴 틈이 없었다!


주중에는 재활하느라 바쁘다.

오전, 오후는 치료사님들과, 밤에는 남편과

재활에 매진하면 하루가 뚝딱이다.


금요일 밤에는 엄마가 놀러 온다.

신나게 수다를 떤다.

엄마와 함께 여러 재활운동도 한다.


토요일 점심에는 아빠까지 놀러 온다.

아빠가 남편을 든든히 먹이고

나는 엄마랑 도시락을 냠냠 먹는다.

그 이후엔 다 같이 모여 도란도란 담소타임을 가진다.


일요일에는 남편과 함께 신나게 보드게임을 한다.

가끔은 노트북으로 주전부리와 함께 예능을 본다.


이 힘든 투병생활 속에서도

기쁘고 즐거웠던 순간들이 제법 많았구나.


인생이란 무엇일까?

참으로도 복잡하고 미묘하구나.




병원생활에 유흥이 더해지자

시간이 더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제법 기분도 괜찮았다.

재활치료가 내 몸을 획기적으로 치료하진 못했지만

꾸준하게 개선시켜 줬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아도

저번주의 나와 오늘의 나는 조금 달랐다.


속도야 어찌 됐든

나아지고 있다는 방향성 자체만으로도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언젠가 잘 걸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간식을 먹는 와중

남편이 조심스레 우리 아빠의 얘기를 전해준다.


"아버님이 많이 불안하신가 봐.

다른 병원 얘기를 계속 꺼내시는 것도 그래서더라고.


아버님 입장에서는 토요일에 오시면

자기가 누워있거나 휠체어에만 앉아있으니


병이 치료는 된 건지

재활은 제대로 되고 있는 건지

걱정이 많아지고 불안하다고 하시더라고.


내가 잘 얘기드리기는 했는데..."


아차! 싶었다.

아빠가 나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하는 것도

다 불안해서일 텐데

나는 달래드릴 생각도 못하고

예민하게 툴툴대기만 했구나...

반성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응?

그런데 엄마는 내 재활 경과를 밤마다 봤는데

아빠한테 말 안 해줬나?

고개를 갸웃한다.




2024년 11월 22일(금)


엄마가 일을 마치고 오후 5시 반쯤 병원에 도착했다.

남편은 부랴부랴 수건, 양말, 속옷 등 빨래를 챙겨서 집에 간다.


엄마에게 넌지시

아빠한테 내 재활 경과나 이런 걸 얘기해주진 않았는지 물어본다.


"그러고 보니 안 해줬네...

우리진지한 대화는 안 해! 하면 싸워!"


생각해 보니 엄마와 아빠가 사이는 좋지만

소통이 잘 되는 편은 아니었다.

경상도 여자와 충청도 남자의 조합이라...


여담이지만 주변에서 우리 엄마 아빠를 보고

서로 소통이 잘 안 된다는데

어찌 사이는 좋으시냐 물은 적이 있다.


나도 모른다.

두 분은 불같이 싸우더라도

엄마는 아빠의 팔베개가 없으면 잠을 잘 못 잤고

아빠는 엄마의 뽀뽀 없이 출근을 안 했다.

엄마와 아빠만의 견고한 애정과 시간은 나의 이해를 초월해 있다.


그리고 내 병은 엄마와 아빠에게도 아픔이었을 테니

서로 화두로 꺼내기 힘들지 않았을까.


이날 나는 결심했다.

내일 아빠가 병문안을 오면

꼭 보행기를 끌고 걷는 모습을 보여주리라.




2024년 11월 23일(토)


결전의 날이다!

아빠가 병실에 도착했다.

식사 타임이 끝나고 다 같이 커피타임을 보낸 다음

병동으로 가는 긴 복도에 휠체어를 잠시 세웠다.


"자기야, 보행기 좀 가져와줘!"


남편이 호라락 달려가서 보행기를 들고 온다.

보행기를 잡고 끙차 일어난다.

남편은 내가 힘이 빠졌을 때를 대비해 뒤에 가까이 붙어 가드 한다.


It's show time!


내가 보행기를 잡고 느리게 복도를 횡단하자

아빠가 활짝 웃으며 박수를 친다.

주변 사람들도 한 마디씩 거드며 날 응원해 준다.


아빠가 스마트폰을 들어 올린다.

상기된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내가 걷는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한다.


"그렇지!! 잘하고 있어~~! 좋아!"


내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아빠의 얼굴에 더 활짝 웃음꽃이 핀다.

목소리도 점점 더 격양된다.

아빠의 사랑에 맞추어 나도 더 열심히 걸어본다.

엄마도 옆에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내 입에도 반달이 지어진다.


내가 갓난아기 때 첫걸음마를 했을 때도

이 정도로 기뻐하시진 않았을 것 같다.

※ 정말이다. 나는 삼 남매 중 둘째이다.


우리는 이 순간

E 대학병원에서

가장 행복했던 가족이 아닐까 회고한다.


비틀비틀 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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