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테나 Jun 22. 2018

<허스토리> 아름다운 그녀들 향한 너무 늦은 러브레터

영화 <허 스토리>를 보신 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배우 김희애와 김해숙이 출연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볼만한 가치는 충분했다. 거기에, 요즘 한창 핫한 드라마에 할머니로 자주 출연하는 배우 예수정과, 70년대 은막의 스타에서 편안하고 이지적인 모습으로 돌아온 배우 문숙, 개성 강한 연기로 수십 편의 영화에 조단역으로 출연해 온 배우 이용녀의 조합이 매우 신선했다. 다만, 위안부 할머니들의 '관부재판'이야기를, 주로 감각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민규동 감독이 연출했다는 사실에, 신선함에 대한 기대 반, 주제의식에 대한 우려 반의 심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관부재판'

영화는, 1992년 부산의 일본군 '위안부'와 '근로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공식적인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 '관부재판'을 소재로 하고 있다. 피해자 할머니 10명이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서 6년의 법정다툼 끝에 1심에서 일부 승소를 거두었고, 대법원에서 패하고 말았만, 일본 법정이 '위안부' 관련 피해 사실을 최초로 인정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는 재판이었다.


영화는, 1991년 '정신대문제 대책 부산협의회'를 설립하고, '관부재판'을 주도했던 김문숙 이사장(영화에선 문정숙/ 김희애)과, '관부재판'을 시작한 4명의 할머니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90년대, 국내에서 조차, 정신대문제에 대해 사회적 인식이 희미하던 상황에서, 영화는 소송에 나선 그녀들이 겪은 차가운 시선과, 억울한 상황들, 수많은 편견과 힘겹게 싸워나가는 모습을 통해, '관부재판'의 작은 승리에는 많은 사람들의 진심 어린 열정과 의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 재판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들은, 위안부 기념관 건립 준비를 하는 것으로 이 문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이야기한다.  


당당하고 아름다운 그녀들!

 일본 법정에서 각각의 사연을 풀어놓는 위안부와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모습은 매우 당당하고 아름답다. 또래보다 똑똑해서 끌려가고, 아들 대신 딸이라서 끌려가고, 좋은 데 취직시켜 준대서 끌려간 그녀들은, 이제 두려울 것도, 거리낄 것도 없이, 듣지 않으려는 일본 정부를 향해 당당히 상처의 흔적을 내보이며 소리친다. 개인적으로는 한 없이 평범하고, 부족한 할머니들일지라도, 우리나라의 수많은 피해자를 대표해서 소송을 벌이고 있음을 인식한 그녀들은, 어느새 역사의 증인이 되어, 할 말은 하고 마는 당당한 투사의 모습으로 법정에 서고 있는 것이다. 영화적으로 그 모습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소송에 참여한 할머니들을 연기한 4명의 베테랑 배우들 덕분이었다.


배우 예수정과(좌) 배우 문숙(우)
배우 이용녀(좌)와 배우 김해숙(우)


 드라마에선 주로 따뜻한 할머니 모습만 보여주던 배우 예수정은 시크하게 할 말 다하는 평양 출신 박순녀 할머니의 덤덤한 듯 시원시원한 면모를 매력 있게 발산한다. 특히 목욕탕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몸에 새겨진 일본군의 끔찍한 만행은, 그녀의 사연과 함께 여전히 몸과 마음에 남아 있는 상처의 비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울컥한 감정을 전한다. 또, 치매에 걸려 이쁜 것에 집착하는 이옥주 할머니 역할의 배우 이용녀는, 극단의 감정을 오가는 치매 할머니를 바로 눈 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캐릭터를 살려낸다. 주로 강한 캐릭터만 맡던 그녀가 아이 같은 치매환자로 완벽히 빙의한 것은, 몰입감 높은 그녀의 연기 내공 때문일 것이다. 특히 배우 문숙은 지적인 이미지에 이국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위안부 할머니로 보일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나긋나긋한 특유의 목소리에 정감 있는 부산 사투리를 녹여내며 연약한 듯 강인한 시골 할머니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그녀가 연기한 서귀순 할머니와 일본인 교사의 화해의 법정 장면은 그녀의 연기 변신에 힘입어,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는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그려진다.


영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주인공 배정길 역의 배우 김해숙은, 남편과 아들의 학대 속에서도 비밀을 간직한 채, 열심히 살아온 위안부 할머니의 모습을 묵직하고 사실적인 연기로 완성해 낸다. 또, 관부재판을 뚝심 있게 끌고 나가는 또 다른 주인공 문정숙 역의 배우 김희애는,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여성 사업가로서 강한 의지를 열정적으로 표현하며 이야기의 흐름을 주도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이 두 인물, 배정길과 문정숙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그녀들의 상황 변화와 감정의 무게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배우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출중한 연기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국민배우라 해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배우의 연기는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캐릭터와 배우가 가진 외형적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아 몰입이 방해될 수도 있고, 배우나 연출자가 캐릭터 분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연출자와 배우 사이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겨, 영화에 녹아들지 못하는 캐릭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영화 전체를 이끌고 가는 두 베테랑 주연배우들의 연기에서 그런 점이 눈에 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깝다.


어떤 사람들은, 문정숙 역할인 배우 김희애의 사투리 연기가 어색해서 캐릭터에 몰입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연기 100단인 그녀가 영화 속에서 어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투리 연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 속 사투리는 모두 현지인들이 녹음한 파일을 듣고 연기했기 때문에 부산 사람이 들었을 때도, 매우 그럴듯하다고 한다.) 김희애의 문정숙 연기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보다 근본적으로, 배우 김희애의 목소리가 영화 속 문정숙의 캐릭터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이미지야 어떻게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 해도, 지난 삶의 숨겨진 시간까지 무의식적으로 전달해 주는 목소리의 색깔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 속 문정숙은 거친 현실에 맞서 싸우는 배짱과 강단, 꼿꼿한 의지를 가진 사업가다. 그래서 그녀의 목소리는 강단이 느껴지는 단단한 목청에, 시원시원 힘 있는 음색,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정서가 느껴지는 말투가 어울린다. 하지만, 배우 김희애의 목청은 가늘고 여린 데다, 부드러운 음색에 높은 소리 톤, 차분하고 지적인 말투를 가지고 있다 보니, 그녀가 아무리 제대로 된 사투리를 구사하며, 대차고 강단 있는 연기를 몰입해서 한다 해도, 캐릭터에 흠뻑 녹아들지 못하는 계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소리들이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 영화 사운드 문제도 한몫한다. 아마도 소리 톤을 다듬는 과정에서 주파수 대역이 너무 높아지거나 두리뭉실해진 것은 아닌지 싶다)


거기에, 이야기를 전달하는 문정숙이 관객보다 먼저 분노하고 울부짖는 법정 장면은, 감정이 앞서는 그녀를 더욱 낯설고 이질적인 인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배우의 연기력 부족에서 오는 실수라기보다, 캐릭터가 영화 속에서 어떤 이미지로 드러날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작진의 캐스팅 실수이자, 감정의 흐름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연출적 실수라 할 수 있다. 긴 시간 진행되는 드라마와는 달리, 영화는,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 하더라도, 2시간 안에 영화 속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실감 나게 전달하는 덴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감독은 영화 속 캐릭터가 가진 다양한 성격과 영화 속에 드나지 않는 삶의 다양한 요소들까지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가장 적합한 배우를 캐스팅해야 한다. 그런 이미지의 적합성이 담보되었을 때만, 영화 속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일어나며, 영화 속 이야기로 관객들을 깊숙이 데리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연출에 있어서 정서적 계산이 잘 못 됐음이 드러나는 또 다른 장면 중 하나는, 배우 김해숙이 연기하는 배정길 할머니의 법정 장면이다. 앞서 서귀순 할머니의 법정 신에서 일본인 교사의 증언과 화해를 통해 감정적 정서를 한껏 끌어올려놓은 영화는 배정길 할머니가 평생 숨겨온 비밀이 드러나면서 영화적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 비밀은 관객들이 볼 때, 너무나 흔한 코드의 비밀이었고, 밝히고 싶지 않았던 비밀까지 폭로하면서 일본 정부를 향해 날을 세웠던 배정길 할머니의 흥분된 감정은, 재판이 잠시 휴정하는 사이, 아들과 함께 교감하며 감정을 추스름으로써 맥이 끊겨버린다. 그래서 그 이후 벌어지는 일본 정부를 향한 배정길 할머니의 분노가 또다시 폭발하는 장면은 어색한 감정의 과잉이 돼버리고 만다. 한마디로 감정의 폭발이 일어나야 하는 영화의 절정 부분이, 이야기의 구조적 문제로 맥이 빠지면서, 국민 어머니라 불리는 배우 김해숙의 열연마저, 낯설고 공허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말 장면들은 뭔가 정리될 듯 정리되지 않는 채, 산만하게 진행된다. 일본 후원회와의 해단식에선, 변호를 맡았던 이상일 변호사가 "이기지 못해서 죄송하다"라고 사과를 하고, 배정길은 한풀이라도 하듯 수백 명이 자리한 그곳에서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며, 문정숙은 기념관을 만들겠다고 할머니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감독은 이기지 못한 재판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결말에 대해 뚜렷한 선택을 하지 못했고, 할머니들을 위로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제대로 위로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니 조용하기만 하던 배정길 할머니가 무대에서 박수 치며 노래를 부르는, 캐릭터 성격을 완전히 벗어난 행동이 등장하고, 기념관 준비를 위해 문정숙이 할머니들과 사진을 찍는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긴커녕, 안일한 앤딩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마도 감독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문정숙의 대사를 넣어 영화적 주제의식을 살리고자 한 듯한데, 정서적 감동도, 깊이 있는 의미도 실리지 않은 채, 갑작스 대사로 내뱉어진 주제의식은, 그저 공허한 외침이 될 뿐이다.  


만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란 주제의식이 처음부터 이 영화의 핵심이었다면, 영화는 그 주제의식을 살릴 수 있는 복선이나 상징적 내용들을 은연중에 배치해 두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복선은 보이지 않고, 마지막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뜬금없이 던져지니, 어색하기만 할 뿐이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주제의식을 살리기 위해선, 차라리 1990년대에서 벗어나, 2018년 지금의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상황들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의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자막도, '관부재판'에서 싸웠던 할머니들이 전부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을 강조하는 내용 대신, 9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부산에서 위안부 역사관을 운영하는 문정숙의 모델, 김문숙 이사장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실제 위안부 역사관에 전시된 의미 있는 사진들을 덧붙여 보여줬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는 할머니들의 힘겨운 싸움과 놀라운 의지가 주제적 측면에서 훨씬 강조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관부재판' 이야기에,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적 문제의식을 덧붙여 새로운 주제로 표현할 수도 있었다. 바로 일본 재판정이 법정 사과를 거부하고, 인도적 차원의 지원금을 주겠다는 제안에, 피해자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을 자세히 다루는 것이다. 실제로 '관부재판'에서도 일부 피해자들은 도의적 책임만을 인정한 지원금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사과와 잘못을 인정하는 법적인 배상금을 받아내야 한다는 용감한 할머니들이 있었기에 '관부재판'은 계속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부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면, 영화는 자연스레 위안부 할머니들이 바라는 것이 진심 어린 사죄와 일본의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란 주제가 부각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 주제의식은,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라는 현실적 문제 상황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어, 현실 속에 반복되는 역사적 의미까지 되새겨 볼 수 있는 매우 의미심장한 주제의식이 될 수도 있었다.


너무 늦게 도착한 러브레터!

<허스토리>는, 5년쯤 늦게 도착한, 낯선 러브레터 같다. 아름다운 그녀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담겨 있지만, 때 늦은 감정의 낯선 고백은 현실의 삶에서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관부재판'(1996년)이 끝난 지 22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위안부 문제에 대한 많은 사회적 변화들이 일어났다. 이제 우리나라에선, 위안부 할머니들을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일본 정부에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졌고, 일본 대사관 앞은 물론 세계 곳곳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 회복을 염원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고 있다. 이제 위안부 문제는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미국 하원 의회에선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반성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표하기도 했고, 프랑스에선 일본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만화가 전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끈질긴 사죄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여전히 위안부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 배상을 하지 않았고, 급기야 2015년 말,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위안부 문제에 관한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해줌으로써, 제대로 된 사과와 법적 책임마저 묻지 못하게 되는 어이없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20여 년의 세월 동안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인 책임을 묻던 할머니들의 피나는 노력이 우리 정부에 의해 헛되게 날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

  

2018년의 이러한 현실적 상황에서 봤을 때, 위안부 할머니들의 중요한 발자취였던 '관부재판' 이야기는, 그 어느 때 보다 가장 의미 있고 절실한 영화가 될 수도 있었다. 1990년대에 있었던 '관부재판'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2015년에 일본과 맺은 '위안부 합의'가 왜 불합리한 것인지, 잘못을 인정하는 법적 배상금과, 책임이 분명치 않은 도의적 위로금의 차이가 무엇인지, 2018년 현재의 국민들에게 정확히 보여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스토리>는 그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관부재판'의 숨은 역사적 의미와, 2018년이라는 현실적 상황에서 '관부재판'을 되짚어 봐야 하는 시대적 요구를 제대로 고찰하지 못한 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소극적 주제의식만 간신히 이야기하는데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는 식의 주제는, 20여 년 동안 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던 수많은 콘텐츠들에서 무수히 반복해 이야기되어 온 주제이다.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상황에서, 여전히 똑같은 주제의식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90년대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너무 뒤늦은 이야기이자 안일한 태도의 주제의식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이야기 콘텐츠를 창작할 때에는,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의 핵심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과, 그 역사가 지금 이 시점에 왜 이야기되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옛날 역사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시대적 상황의 필연성 위에, 가슴을 울리는 역사적 이야기가 풍성한 깊이로 펼쳐지는 콘텐츠를 만났을 때, 우리는 시대를 아우르는 역사적 의미와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사실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의 깊이가 충분히 깊어졌을 때에만 우리가 원하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허스토리>는 정말... 너무... 많이! 안타까운 영화이다!




텔레비전에 방송된 <허 스토리>를 보니 절정부분에 배정길 할머니의 감정적인 편집 오류를 많이 들어 내고, 자막도 할머니들의 죽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노력으로 조금 바꿨네요! ^^;

매거진의 이전글 <스탠바이, 웬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