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오랜만에 보는 코미디 영화였다. 공감이 가는 코믹한 상황 속에, 엉뚱하고 시원시원한 대사들은 관객들에게 심심치 않은 웃음을 유발하기에 충분했고, 이렇게 코믹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그 재미는 더했다. 특히 신선했던 것은 주인공 학수(배우 박정민)가 랩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장면들이었는데, 영화 속 음악들과 어우러져 영화의 개성과 신선함을 드러내는 데 제대로 한몫을 해내고 있다.
주인공 학수가 '쇼미 더 머니' 예선에 참가하는 래퍼이기에 가능한 이 설정은, 음악 영화를 3개나 만든 전력이 있는 이준익 감독의 다양한 시도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특히 랩으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는 것은, 영화적으로 1인칭 내레이션의 창의적 변형으로 볼 수 있으며, 기존에 이준익 감독이 만들어 왔던 영화 속 주인공의 내면을 설명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변산> 영화 속 랩 내레이션과 가장 가까운 것은 이준익 감독의 다른 영화, <동주>에 등장하는 '시' 내레이션이다. 시인 윤동주의 삶을 다룬 영화 속, 중요한 포인트들에서 차분한 시인의 음성으로 낭송되는 '시'들은, 자연스럽게 시인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내레이션의 기능을 하며, 정서적 표현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물론, 인물을 보다 깊숙이 이해시키는 효과를 거둔다. 또 조금 오래된 영화지만, <왕의 남자>에 나오는 마당극 속 광대들의 '사설' 또한 인물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며 숨겨진 관계성과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설명하는 방법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다. 이처럼 이준익 감독은 다양한 영화적 요소들을 활용하며 주인공의 심정을 직접 설명하는 방식을 자주 사용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영화 <변산>의 성격상, 이준익 감독이 젊은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도구로 랩 음악을 가져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랩만큼 세대 간의 구분을 명확히 보여주는 음악도 흔치 않을뿐더러, 언어를 속사포로 쏟아내며 주인공의 생각과 관점을 직접 표현하는 랩은, 가장 적나라한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내레이션 랩에는 배우 박정민이 쓴, 학수의 내면화된 생각들이 잘 담겨 있다. 특히 신선하게 느껴지는 랩 내레이션은 학수가 처음 고향으로 차를 몰고 내려가는 장면에 나오는 랩으로, 고향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학수의 입장과, 영화 속 중요한 단초가 되는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 밖에 없네!"라는 시의 한 구절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직 가시지 않은 분노를 가진 채 만나게 된, 병든 아버지! 그리고 끊임없이 학수를 변산에 붙잡아두는 사건들! 모든 것은,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 소식을 학수에게 전한 선미(배우 김고은)로부터 시작한다. 그녀는 고등학생 시절 학수를 짝사랑했으며, 그가 쓴 시에 감명을 받은 오랜 팬이다. 그녀는 학수가 변산으로 내려온 날부터 그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며 긍정적 방향으로 학수를 이끈다. 영화적 코믹 요소들은 주로, 선미와 고향 사람들의 엉뚱한 모습들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그중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선미와 그녀의 아버지(배우 정규수)가 보여주는 능청맞은 연기들이다. 특히 여주인공인 선미 역할의 김고은은, 학수에 관한 모든 소식들에 안테나를 세우고, 그에 대한 관심을 순진하게 내보이며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의 마음을 학수가 몰라주자, 아버지에게 엉뚱한 화풀이도 하며 큰 웃음을 준다. 또, 병실 안에서 선미와 학수 주변 친구들과, 아버지를 홀대하는 학수까지 본 선미 아버지(배우 정규수)는, 꼬박꼬박 끼어들어 할 말 다 하는 캐릭터로 크고 작은 웃음들을 쏠쏠히 만들어 낸다.
잘 만들어진 코미디가 대부분 그렇듯, <변산>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에게 숨겨진, 순박한 모습이나 지질한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캐릭터와 사건의 코믹한 요소들을 부각시킨다. 특히, 인물들의 감정이 솟구치는 상황에서 내뱉어진 엉뚱한 대사나 욕설들은, 인물의 숨겨진 감정마저 몽땅 드러내며 관객들의 폭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대표적인 장면이, 고등학생 시절 선미가 학수에 대한 연민과 이해의 감정을 깊게 느끼게 되는 노을 신이다. 노래방에서 학수에게 상처를 받은 선미는 우연히 학수가 엄마 무덤가에 앉아 노을을 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 모습을 보며 선미는 학수의 감수성과 외로움을 이해하게 되고, 여전히 학수에게 끌리는 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하지만, 그런 결정적 순간, 선미의 입에서 우렁차게 튀어나온 것은 걸진 욕설! 학수에게 상처받았지만 계속 호감을 느끼는 그녀의 이중적인 마음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학수가 발끈하며 소리 지르는 것으로 끝나는 이 신은, 서정적으로 시작해서 재미있는 코미디 장면으로 완결된다. 자칫 학수의 우울한 정서와 선미의 감상만 전하며 끝나버릴 뻔한 조용한 신에, 코믹한 요소를 첨가해, 에너지 넘치는 신으로 만듦으로써,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이다.
영화 <변산> 속 세계는, 순박한 사람들이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며 사는 세계이다. 한 때 학수를 짝사랑했던 선미는 1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학수를 좋아하며, 그가 가지고 있던 착한 본성을 되살리고 싶어 한다. 학수의 고향 친구들은 몇 년째 한 번도 고향에 내려오지 않는 학수의 어머니 묘소를 때마다 돌보고 있으며, 십 년여 만에 만난 건달 친구는 학수에 대한 청부 폭력을 주문받지만, 친구로서 해묵은 감정을 푸는데만 집중한다. 또, 건달로 유명했던 학수 아버지의 꼬붕이었던 아저씨는 '파트너'를 외치며 병든 학수 아버지 곁에 남아 시중을 들며 의리를 지키고 있으며, 학수의 건달 친구조차 학수 아버지를 형님으로 깍듯이 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것이 영화 속 판타지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비현실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모습에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인간적인 따뜻함과 의리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순박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조화롭게 만들어 가는 <변산>의 청춘 코믹 이야기는 짠하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흐뭇하게 전달해 준다.
물론, 이 영화는 구성적 측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영화는 아니다. 특히 가장 아쉬운 부분은, 학수가 시 쓰기를 그만두고 래퍼로 방향 전환을 한 계기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과 학수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한 영화적 결론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학창 시절 학수의 시 쓰는 능력이 대단했던 데다, 그를 동경하고 짝사랑했던 선미가 현재, 소설가로 성공한 모습까지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학수라는 인물 캐릭터를 좀 더 깊숙이 이해하기 위해선 래퍼로 전향한 이유가 명확히 드러났어야 했다. 또, 영화 속 이야기가 아버지와 관계를 통한 학수의 성숙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마지막 화해를 나눈 후 학수의 변화는 이야기 구성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영화 <변산>은 그 부분을 그냥 간과하고 말았다. 배우 박정민이 영화 마지막 '쇼미 더 머니' 무대에서 보여주는 랩 가사 내용에는 적어도 이 부분이 좀 더 뭉클하게 들어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배우에게 가사를 직접 쓰게 하면서 감정 몰입을 유도하긴 했지만, 영화적 완성도를 위한 작품 전체의 핵심 주제와 의미를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이를 완성도 높게 끌어내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영화는 2시간 동안 낄낄거리며 볼 수 있는 재미를 주고는 있지만, 찡한 울림을 주는 여운과 감동은 던져주지 못한 채 아쉽게 끝나고 만다.
이런 드라마 구성상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변산>의 코미디적 요소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긍정적 평가를 하는 이유는, 이준익 감독이 가진 코미디에 대한 철학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는 영화 속 세계는 언제나 따뜻하고, 짠하게 슬프다. 이준익 감독은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코믹한 상황과 정서들을 통해, 현실에 지친 관객들에게 소중한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그래서 그가 만드는 코미디는 아무리 유치하고, 현실적이지 않더라도, 순수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영화를 대중예술이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신선한 주제의식과, 스토리가 가진 구성력, 상징적 메타포와, 창의적 표현 방식 등으로 예술적 완성도를 가늠해 보곤 한다. 하지만, 감정적 카타르시스가 예술의 핵심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에서 볼 때, 영화가 주는 정서적 위로와 카타르시스적 교감은 가장 중요한 예술의 척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 <변산>은 꽤 괜찮은 영화이다. 체계적 구성이 만들어 내는 완성도 높은 결말엔 이르지 못했지만, 영화를 보는 2시간 내내, 영화 속 세계가 만들어 내는 따뜻한 정서와, 위로가 되는 웃음의 재미를 관객들이 흠뻑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웃음과 따뜻한 정서가 넘치는 이 영화를 보며 소소한 옛 추억들을 회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