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손이 절대 장애라고 생각 안 합니다.”
흑백요리사 1을 워낙 재밌게 봤던 사람으로서 2편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내가, 우승자까지 이미 뉴스로 접한 뒤에야 마음 편히 정주행 중인데, 점심을 먹으며 모니터를 켜놓고 보고 있다가 이 문장이 나오는 인터뷰에서 스페이스바를 누르고 눈물이 왈칵 나왔다.
우리는 늘 기준 위에 산다. 선악을 나누는 것도,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것도,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나누는 것도, 그리고 장애와 비장애를 나누는 것까지도.
나는 우리 세대에 살아가는 그 누구보다도 더 고되고 엄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자부할 수 있다. 사소하게 지나갈 수 있는 것 하나까지 규율이 되었고, 학대일까 싶을 정도의 체벌도 있었고, 그 시간들을 겪고 자라서일까. 나는 나 스스로에게도, 외부에도 그 잣대를 항상 마치 칼춤을 추는 무당이 서 있는 시퍼런 칼날만큼 날을 세워 겨누곤 했다.
사소하게는 이런 것부터 시작이다. 내 머리는 왜 직모가 아니고 반곱슬일까. 반곱슬의 비애는 습한 환경에서 더 잘 보인다. 날씨가 습한 것을 내 피부보다 머리카락이 더 빨리 반응해서 부스스하게 머리 전반에 걸쳐 일어나 있는 잔머리들을 보고 있자면, 아, 습한 날씨구나 싶어진다. 남들의 시선에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에는 그 부스스함이 싫어서 늘 매직 스트레이트로 쫙쫙 폈었는데, 시술이 비싸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들고 자주 하러 가야 하고, 모든 것이 다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둘러보면 내 주변에는 온통 불만거리가 가득했다. 왜 나는 체질적으로 마르지 않았을까, 왜 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아닐까, 남들은 잘만 흘려보내는 기억들이 내 머릿속엔 왜 이렇게 오래 남을까, 왜 나는 더 다정한 아빠를 만나지 못했을까, 나는 사람이 잘 붙지 않고 내가 꼭 다가가야만 하는 편일까 등등.
적다 보면 한 자리에서 서른 개는 넘게 쫙 적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것들이, 사실 어떤 잣대를 놓고 내가 비교하는 것임을 깨달았던 건 서른이 다 되어서였던 것 같다. 한국 나이로 스물일곱, 나는 그 한 해를 나 스스로에게 잠깐 쉼표로 주었다. 허겁지겁 달려오던 대학생활과 첫 실습을 마친 이후, 곧이어 실습을 나가지 않고 한 해를 쉼표로 줘야겠다 싶었기에. 그리고 그 한 해는 당시 나의 엄마, 아빠의 우려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참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해에 나는 사람을 잃었고, 나 자신도 잃었다. 12월 말 즈음 혼자 훌쩍 떠났던 파리의 센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약간의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맞으며 펑펑 울었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나를 그 모든 잣대에서부터 조금 자유해지게 만들었다. 나를 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약간의 강박을 놓을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기에, 오히려 나의 생각의 끈을 자유롭고 느슨하게 만든 것 같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나는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고,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하며,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엔 내가 아직 어리고 서투르며 나의 기준이 항상 옳다고만 할 수 없음을 차츰 깨달아 갔다. 그리고는 서른이 넘은 어느 날, 나의 반곱슬 머리가 더 이상 나에게 거슬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게 만든 한 문장이었기에 순간 눈물부터 나왔던 걸까. 감히 장애라는 것과 비할 수 없지만, 나의 불완전함을 장애처럼 여겼던 수많은 시간들이 생각났기에.
나는 나에게 일어난다면 감히 상상할 수 없고 견뎌낼 자신이 없어 보이는 고난을 겪고 자신의 자리에서 우뚝 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렸을 때는 그 성공의 결과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나는 어느새 그 과정에 더 귀를 기울이고 초점을 맞추곤 한다. 과정 속에서 내가 혹시 배울 부분이 있을지, 시간이 지난 다음에 내가 혹여나 비슷한 시간을 겪게 된다면 차용해서 도움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 싶은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각자 자신의 고난을 감내하며 살아가지 않나 싶기도 하다. 다른 이의 인생의 무게를 가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아직 결과값을 알 수 없는 과정을 살아가는 인생들에 대한 또 다른 나의 잣대 내려놓음의 방법이기에. 그 모든 인생들에 다함없는 브라보를 보낸다. 오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