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을 입는 사람

by Ben Frost

"어머, 너 생일 아니니?"


2년 전 어느 봄날, 은사님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근처 쇼핑몰로 가서 아이 선물까지 골라 받은 뒤였다. 내 옷도 골라보라 말씀하셔서 저도 선물 주시는 거냐 물었더니 선생님은 저렇게 물으셨다. 계절이 다른 나의 생일은 아직 한참 남아 보였고, 선생님께 만류하는 의사를 표하자 내심 아쉬워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셨다.


"좀 밝은 색도 입고 그래. 볼 때마다 어두운 색 옷만 입는 것 같아서. 밝은 색 옷 좀 사주려고 그랬지."


이 짧은 대화가 선생님과 함께했던 마지막 식사 나들이가 되어서일까. 어두운 색의 옷으로 상하의와 외투까지 장착하는 겨울이 되면 자주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곤 한다.


다른 계절에는 그렇게까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데, 겨울이 되면 전체적인 옷의 부피가 있어 사람들의 덩치가 커 보여서일까, 아니면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계절이라 색채라곤 사람들의 옷뿐이어서일까. 출근 버스에 올라타 맨 뒷자리에 앉고 나면 앞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외투가 어두운 계열임을 보게 된다. 거의 검은색, 간혹 남색, 그중에 밝은 색은 한 명이라도 있으면 확 대비되어 눈에 띌 정도로 잘 없는 편이다.


언제부터 검은색을 즐겨 입었더라. 통통한 몸을 감싸려고 입기 시작한 것이 사실인데, 어느새 검은색 옷을 즐기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쩌다 한 번씩 밝은 색 옷을 입으면 맨몸으로 나간 것 같은 못 견디겠는 느낌이 있고, 혹 외투는 밝은 색을 입더라도 얼굴 가까이에 있는 옷은 최소한 톤 다운된 셔츠를 입게 된다.


한편 이미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친구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 중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유치원 초반까지는 부모님이 입혀주는 대로 잘 입는 편인데, 유치원 중후반부터는 모든 옷이 무채색 계열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들을 거부하고 그런 옷들을 유치해한다는 말에, 아직 그 지점에 도달하지 않은 우리 아이에게 최대한 알록달록한 옷을 많이 입혀야겠다고 내가 대답하며 결심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선생님의 저 이야기를 나의 웃어른들께 들려드리니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이가 들수록 색깔이 선명한 옷을 많이 찾게 된다며, 얼굴이 푸석해지고 생기가 없어질수록 색감 있는 옷을 입게 되는 것 같다고 하셨다. 오 그런가요 하면서 생각해 보고, 나가서 둘러보니 어르신들은 과감한 색상을 입는 데 거침이 없는 느낌이 들었다.


비단 얼굴의 문제일까 싶다. 그만큼 세상살이에 거침이 없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그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던 때를 지나 누가 뭐래도 내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옷 색깔에 제약이 없어지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역시도 수미상관인 건가 싶어서 나는 혼자 무릎을 탁 쳤다. 태어나면서는 다양한 색상의 옷을 입다가, 중간에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무채색을 찾다가, 다시 나이가 들면서는 선명한 색으로 가는 것이.


"엄마, 엄마의 머리색은 왜 검은색이야?" 며칠 전, 아이가 나의 얼굴을 붙잡고 물어본 질문에 나는 되묻는 질문으로 대답했고, 아이가 대답을 못 하자 씩 웃고 말았었다. 오늘 거울을 보며 문득, 검은색 머리가 싫어 늘 물들이는 데 열심이었던 나의 20대가 떠올랐다. 미국에서 살던 끝 무렵 셀프 염색을 했다가 두드러기가 심하게 올라온 이후로 더 이상 염색을 안 하게 되었는데, 한 번씩 친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머리가 왜 이렇게 까맣지?"였다.


난 이제 내 머리를 물들이지 않는다. 한 번씩 다른 색을 하고 싶은 생각이 스쳐도 에이 하고 흘려보내는데, 비로소 내가 나의 머리색을 인정하게 된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리하여 나이 듦은 스스로에 대한 인정을 배우는 시간인 건가 싶기도 하다.


머리색은 그러하지만 아직 옷에서는 자유하지 못한 나는 오늘도 어두운 색으로 온몸을 감싸고 출근했다. 아직 한창일 때 밝은색 옷을 입으라는 선생님의 잔소리 아닌 잔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지만 쉽게 용기를 내기 어렵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한 번씩은 입어줘야지. 그리고 그런 날은 꼭 사진을 찍어둬야지. 나중에 나이가 든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작가의 이전글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그리고 살아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