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재단의 탄생: Cartier는 왜 예술 재단을 만들었는가
1984년, 파리 몽파르나스 인근 (파리 중심부에서는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거리)에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까르띠에 현대미술 재단)이 세워졌다. 설립 당시, 럭셔리 업계와 미술계는 모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당시 ‘상업 브랜드가 미술 재단을 만든다’는 개념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예술계는 기업의 개입을 경계하던 시기였다. 이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인물은 까르띠에의 전설적 CEO 알랭 도미니크 페랭(Alain-Dominique Perrin)이었다. 그는 브랜드의 장기적 위상을 ‘제품’이 아닌 ‘문화적 영향력’에서 찾았고, 그 비전은 결국 현대 럭셔리 산업 전반을 바꾸는 선례가 된다.
페랭은 재단의 정체성을 단순한 후원 기관으로 규정하지 않고, “살아있는 예술가들의 실험실(Laboratoire des artistes vivants)”이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이 말은 두 가지 면에서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첫째, 기업 후원은 전통적으로 ‘이미 완성된 예술’을 소장·전시하는 방식이었는데, 까르띠에는 반대로 아직 실험 중인 예술을 브랜드가 직접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둘째, 까르띠에가 추구한 ‘실험실’은 특정 장르나 국가를 제한하지 않고, 철학자·과학자·인류학자·패션디자이너 등 동시대 지식 생산자 전체를 포함했다. 이는 1980년대 초반 서구 미술계에서 드문 ‘초다분야적(multidisciplinary)’ 접근이었다.
그렇다면 왜 한 주얼리 하우스가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페랭은 명확했다. “브랜드가 시대와 함께 살아가려면, 시대를 해석하는 예술가들과 호흡해야 한다.” 즉, 까르띠에가 추구한 것은 브랜드 이미지 강화가 아니라 브랜드의 인지적 지평을 넓히는 ‘문화적 실험’이었다. 당시 까르띠에는 “럭셔리는 장식이 아니라 세계관이다”라는 철학 아래에 있었고, 이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 예술가의 시각적·사유적 실험을 브랜드의 미래 정체성의 일부로 흡수하고자 했다.
1980년대 초반은 브랜드와 예술이 멀리 떨어져 있던 시대였다. 럭셔리 브랜드는 상업적 이미지, 예술은 순수한 가치로 여겨지며 두 분야의 접점은 거의 없었다. 까르띠에 재단 설립은 그 질서를 정면으로 흔들었다. 브랜드가 예술을 후원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동시대 예술의 생산 현장을 “공공적 기관”의 형식으로 운영한다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단순한 후원이 아니라, 럭셔리 브랜드가 문화의 공공적 역할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첫 사례였다.
이때부터 럭셔리 업계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다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브랜드는 단순히 소비재를 만드는 기업인가, 아니면 시대의 미학을 제시하는 문화 주체인가?”
까르띠에 재단은 이 질문에 가장 먼저 “그렇다”고 대답한 기관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1994년 장 누벨(Jean Nouvel)의 유리·철 구조 건축물로 재단이 이전하면서 더욱 명확해진다. 이 건축물 자체가 ‘투명성·경계의 해체·열림’이라는 현대적 예술철학을 구현하며, 재단의 모토를 물리적 공간에 새겨 넣었다. 결과적으로 1984년의 출범은 럭셔리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까르띠에 재단은 브랜드의 컬처 전략을 ‘마케팅이 아닌 문화 기여’로 끌어올렸고, 이 모델은 이후 루이 비통 재단, 프라다 재단 등 글로벌 럭셔리 하우스들이 따라가는 원형이 되었다.
즉, 까르띠에 재단의 탄생은 한 브랜드의 실험이 아니라 ‘문화와 럭셔리의 새로운 관계’를 선언한 사건이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보는 럭셔리·예술 협업의 거의 모든 근간은 이 시점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