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로 보는 까르띠에 part 1
경매장에서 까르띠에(Cartier)의 보석이 등장하는 순간, 숫자는 더 이상 단순한 가격의 의미를 잃는다. 그것은 하나의 시대가 남긴 감정과 권력, 사랑, 제국, 그리고 기억이 집약된 결정체로 기능한다. 특히 소더비(Sotheby’s)와 크리스티(Christie’s)에서 기록된 까르띠에의 최고가는 브랜드가 쌓아온 미학적 헤리티지의 깊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까르띠에의 경매사(auction history)는 단순한 럭셔리 시장의 풍향계가 아니라,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문화·정치·사회사의 압축된 레이어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2014년 소더비 홍콩(Sotheby’s Hong Kong)에서 약 2억 1,400만 홍콩달러(약 2,744만 달러)에 낙찰된 허튼–므디바니 비취 목걸이(Hutton-Mdivani Jadeite Necklace)다. 비취(翡翠, Jadeite) 시장에서 이 작품은 단순히 최고가라는 숫자를 넘어, 비취 문화와 왕실 권력, 식민지 시기 무역과 20세기 사교계의 욕망이 집약된 상징적 오브제다. 이 목걸이는 본래 청나라 황실의 왕족이 소유했던 제이드 비드(Jadeite bead)로 알려져 있으며, 비취 한 알의 직경이 15mm를 넘는 것은 현재 시장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희귀성이다. 비취 전문가들은 이 목걸이를 두고 “현재 알려진 비취 중 세계 최상급 Grade A”라고 평가했고, 이는 카슈미르 사파이어나 버마 루비에 대응하는 비취 세계의 절대적 지위를 의미한다. 이 비취 알들은 1930년대 초 상하이(Shanghai)–홍콩(Hong Kong)–런던(London)을 거쳐 서구에 들어오는데, 이 과정 자체가 당시 동아시아 보석 시장과 서구 상류층의 교류를 보여주는 역사적 경로로 평가된다.
결국 이 보석은 미국의 상속녀이자 ‘가장 부유한 소녀’라는 별명을 가진 바버라 허튼(Barbara Hutton)에게 도착한다. 허튼은 울워스(Woolworth) 백화점 재벌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로, 1930~60년대 미국·유럽의 사교계에서 가장 화려한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당시 패션·미술·보석에 대한 그녀의 취향은 곧 상류 사회의 기준 자체로 기능했다. 허튼은 제이드 비드(Jadeite bead)를 까르띠에에 맡겨 금과 다이아몬드로 구성된 독창적인 잠금 장식(mounting)을 제작하게 한다. 이 잠금장치는 편리함을 더한 장식 요소일 뿐 아니라, 까르띠에가 20세기 글로벌 아시아 취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까르띠에의 디자이너들은 비취의 균일한 색감과 광택을 강조하기 위해 최대한 미니멀한 금세공을 사용했으며, 이는 “까르띠에는 원석을 지배하는 브랜드가 아니라 원석을 해석하는 브랜드”라는 평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허튼이 나중에 조지 왕자 가문 출신의 알렉세이 므디바니(Alexis Mdivani)와 결혼하면서 이 목걸이가 “허튼–므디바니 비취 목걸이(Hutton-Mdivani Necklace)”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므디바니(Mdivani) 가문은 1920~30년대 유럽 사교계의 가장 화려한 왕족 가문 중 하나였으며, 이 결혼 자체가 상류층의 세계적 네트워크를 상징했다. 즉, 이 목걸이는 중국 왕실–서구 사교계–미국 재벌–유럽 왕족이라는 네 개의 권력 레이어를 모두 거친 유일한 보석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비취 시장에서 사실상 ‘역사상 최고 품질’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보석은, 단순한 원석의 희귀성 때문만이 아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까르띠에가 20세기 상류 사회의 미적 취향을 어떻게 규정했으며, 동시에 각 시대 권력자들과 어떤 방식으로 교감했는가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증거다.
소더비는 이 작품을 “동서양 보석미학의 절정(Epitome of East–West jewelry aesthetics)”이라고 소개했고, 홍콩 경매 관계자들 역시 까르띠에 컬렉션 가운데서도 가장 문화적 함의가 큰 작품 중 하나로 평가했다. 이 목걸이가 2014년 홍콩에서 아시아 컬렉터에게 다시 돌아간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한 세기 동안 서구 사교계를 떠돌던 비취가 다시 동아시아 문화권으로 귀환했다는 점에서, 이 보석은 단순한 경매 낙찰을 넘어 문화적 순환과 미적 취향의 세계적 이동을 상징한다.
비슷한 위상을 지닌 경매 기록으로는 2015년 소더비 제네바(Sotheby’s Geneva)에서 약 3,042만 달러에 낙찰된 선라이즈 루비 & 까르띠에 반지(Sunrise Ruby & Cartier Ring)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단순히 “비싼 루비 반지”가 아니라, 현대 보석 시장에서 ‘루비가 얼마나 희귀한가’라는 개념 자체를 다시 정의한 사건이었다.
선라이즈 루비(Sunrise Ruby)의 핵심은 25.59캐럿이라는 압도적 크기보다, 그 훨씬 이전 단계에 위치한 ‘비둘기 피(Pigeon’s Blood)’ 컬러의 완전성이다. 세계 최고의 보석 감정 기관 중 하나인 GRS(GemResearch Swisslab)는 이 루비를 감정하면서 “색상·투명도·자연 광학 효과가 모두 최고 등급에 해당한다”라고 명시했다. 특히 버마의 모곡(Mogok) 광산에서 산출된 루비는 이미 1960~70년대부터 생산량이 급감해, 이 정도 크기와 퀄리티의 루비가 시장에 등장하는 일은 사실상 기적에 가까운 사건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역사적 배경이 있다. 전통적으로 루비는 왕과 제국의 보석이었다. 미얀마 북부의 모곡 루비는 19세기 영국 식민 시기부터 “지구상에서 가장 희귀하고 강렬한 붉은색”으로 평가받았고, 실제로 영국 왕실의 보석 관리자였던 조지 쿠넬(George Kunz)은 이 지역 루비를 두고 “다른 어떤 붉은 보석도 모곡의 불꽃을 따라오지 못한다”라고 썼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모곡 광산은 점차 폐광되었고, 대형·고품질 루비는 세계 시장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라이즈 루비는 등장 자체가 지질학적·역사적 행운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까르띠에는 1920~30년대부터 이러한 ‘왕의 보석’을 누구보다 정교하게 세팅해 온 메종(Maison)이다. 까르띠에의 역사 속 루비 세팅은 인도의 모굴(Moghul) 보석 전통, 프랑스 아르 데코(Art Deco)의 직선적 미학, 그리고 귀족 사회의 컬러 취향이 결합한 형태로 발전했고, 까르띠에는 루비의 “불꽃같은 내광(內光, inner fire)”을 강조하는 세팅 기법을 개척했다. 선라이즈 루비 반지에서도 까르띠에는 루비를 다이아몬드로 타이트하게 감싸는 대신, 미세한 띠 형태의 세팅을 사용해 루비 내부의 붉은 광학 효과가 최대치로 퍼지도록 설계했다.
이 반지가 경매에서 3,042만 달러라는 전례 없는 가격이 낙찰되자, 세계 언론은 이를 “루비 시장의 지각 변동”이라고 보도했다.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는 이 반지를 두고, 까르띠에가 수십 년간 구축해 온 ‘색채의 제국(Empire of Color)’이라는 이미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여기서 말하는 ‘색채의 제국’이란, 까르띠에가 20세기 동안 루비의 붉은색, 사파이어의 푸른색, 에메랄드의 녹색, 플래티넘의 백색이라는 색의 군도(color islands)를 통해 보석 세계의 시각적 언어를 재정의했다는 의미다. 선라이즈 루비는 이러한 까르띠에의 색채 전략이 가장 극적으로 증명된 순간이었다. 존재 자체가 희귀한 모곡 루비를, 가장 색채 감각이 뛰어난 메종이 세팅했을 때 발생하는 문화적·경제적 시너지 효과가 바로 3,042만 달러라는 숫자였던 것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선라이즈 루비라는 이름이 파키스탄의 수피(Sufi) 시인 루미(Rumi)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이다. ‘Sunrise Ruby’라는 표현은 사랑의 정열을 뜻하는 은유로 사용되는데, 소장자는 이 루비의 색을 보며 ‘동틀 무렵의 시적 순간’을 떠올렸다고 전해진다. 즉, 선라이즈 루비는 과학적 희귀성과 장식예술의 미학, 그리고 문학적 상징성이 결합된 극히 드문 사례였다. 따라서 선라이즈 루비 & 까르띠에 반지가 만들어낸 경매 기록은 단순한 시장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지질학의 기적(rare geology), 식민지 시대의 역사, 문학적 상징성, 까르띠에의 색채 철학, 상류 사회의 컬렉팅 취향이 모두 중첩된 결과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복합 구조가 까르띠에의 경매 기록을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이유다.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서사가 더해질 때 보석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상승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11년 크리스티 뉴욕(Christie’s New York)에서 약 1,180만 달러에 판매된 라 페레그리나 목걸이(La Peregrina Necklace)다. 이 진주의 여정은 단순한 ‘오래된 보석의 역사’를 넘어 유럽 왕실·전쟁·제국·사랑이 얽힌 세계사 그 자체였다. 16세기 초 파나마 근처 해안에서 발견된 이 진주는 당시 스페인 왕실로 바쳐졌고, 곧 필리프 2세(Philip II)의 손에 들어가 왕실의 초상화 속에 등장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스페인 궁정에서는 이 진주를 “순례자(La Peregrina)”라 불렀는데, 이는 바다 위를 떠다니다 스스로 스페인에 도달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후 라 페레그리나는 스페인의 여러 왕비의 초상화에 등장하며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보르본 왕가를 거쳐 나폴레옹 3세의 동생 샤를로트 공주(Princess Charlotte)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시 영국 귀족 가문으로 넘어간 뒤에도 이 진주는 400년 넘게 유럽의 정치적 변동과 귀족 사회의 전통을 목격한다.
그러나 이 보석이 현대적 신화로 자리 잡은 순간은 1969년,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이 경매에서 라 페레그리나를 낙찰받아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에게 밸런타인데이 선물로 건넸던 때였다. 버튼은 당시 라 페레그리나를 두고 “나는 스페인 왕국의 역사를 내 아내의 목에 걸어주고 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문제는 테일러가 애견을 키웠고, 한 번은 이 진주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초조하게 집안을 뒤지다가 강아지의 입에서 진주를 발견했고, 다행히 손상은 없었다. 이 에피소드는 이후 전 세계 언론에 “역사에서 가장 아찔한 보석 사고”로 회자되며 라 페레그리나의 신화를 더욱 강화했다.
라 페레그리나 진주는 하나의 보석이 아니라, 500년 동안 유럽의 권력 구조를 따라 움직여온 ‘역사 그 자체’였다. 16세기 스페인 펠리페 2세(Felipe II)의 절대권력에서 출발해, 왕실 간 혼맥과 동맹을 통해 영국·프랑스 귀족 사회로 이동하며 유럽의 정치·사회적 중심축을 따라 흘러간 보석이었다. 19세기 제2제 정기의 프랑스 귀족 문화, 20세기 초 영국 상류층의 사교 네트워크를 거치며 이 진주는 ‘왕가의 상징’에서 ‘유럽 상류사회의 문화 자본’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이후 세계 문화 권력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하던 시점에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도달함으로써, 이 진주는 왕실의 유물에서 글로벌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그 지위를 전환한다. 세계사 교과서 속 군주제의 흥망, 제국주의 확장기, 19세기 귀족 네트워크, 그리고 20세기 할리우드의 글로벌 문화 권력이 이 작은 진주 한 알을 매개로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 셈이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20세기 중반 할리우드의 절대적 아이콘이었다. 그녀는 1940~60년대 MGM 스튜디오의 대표 배우로 활약하며 <클레오파트라(Cleopatra)>,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등 수많은 작품에서 명연기를 펼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 차례 수상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그 시기 할리우드는 글로벌 문화 권력의 중심이었으며, 스타는 더 이상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 전 세계 대중문화의 취향과 소비를 결정짓는 문화적 권력자였다.
테일러는 패션, 미, 사치, 사랑, 스캔들, 그리고 무엇보다 하이 주얼리에 대한 탁월한 감식안으로 시대의 미적 기준을 형성한 인물이었다. 그녀의 컬렉션은 20세기 개인 소장품 가운데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컬렉션으로 평가된다. 특히 까르띠에 작품을 여러 점 소유한 대표적 컬렉터로서, 그녀가 사용한 보석은 소장 사실만으로도 대중적·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이는 라 페레그리나 진주가 훗날 세계적 경매 기록 상위권을 차지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테일러는 이 진주를 까르띠에에 맡겨 새로운 목걸이이자 아이콘으로 재탄생시켰다. 까르띠에는 16세기 의복 스타일을 참고해 진주, 루비, 다이아몬드를 조합한 르네상스풍 디자인을 고안하며, 과거의 왕실 유물을 현대의 고급 장식예술로 재해석했다. 이는 단순한 세팅 변경이 아니라, 세계사와 영화사, 장식예술의 계보를 한 작품 안에 봉인하는 작업이었다. 크리스티는 이 작품을 두고 “제국들의 기억을 품은 보석(A jewel that contains the memory of empires)”이라 표현했다.
2011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라 페레그리나 목걸이가 1,180만 달러라는 기록적 가격으로 판매된 순간,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이를 “20세기 보석의 장대한 최종 장면(the magnificent final act of 20th-century jewelry)”이라고 기록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찬사가 아니다. 그동안 왕실과 제국을 떠돌던 진주가 마지막으로 할리우드의 여왕을 거쳐 경매장이라는 역사적 무대에서 ‘보석이라는 오브제’를 넘어 하나의 시대적 신화로 완성되었다는 의미다. 라 페레그리나의 가치는 원석 자체가 아니라, 그 원석을 거쳐 간 권력, 사랑, 제국, 스캔들, 사라진 시대의 잔향이 만들어낸 것이다.
까르띠에의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장에서는 이와 견줄 만한 또 다른 결정적 순간들, 그리고 메종의 절정기에서 탄생해 지금까지도 아이코닉한 작품으로 사랑받는,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까르띠에 보석들을 통해 이 브랜드가 어떻게 세기를 초월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는지 계속해서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