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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Kim Sep 14. 2019

감정에도 '쓸모'가 있다.

혐오와 차별의 쓸모

슬퍼할 필요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무더웠던 지난 여름 세상을 떠난 철학자 김진영은 감정도 그 쓸모를 따져야 할 때가 있음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진정 필요한 때를 가리지 않고 비져나온 감정은 그 목적을 잃고 표류하며, 때로는 누군가를 잔인하게 상처내기도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갈 곳을 잃은 분노와 혐오가 엉뚱한 곳을 향해 쏟아지고 있다. 미투와 함께 꾸준히 불어오고 있는 페미니즘 바람에 ‘백래시'라는 역풍이 불며 여성 혐오 논란은 더 뜨거워졌다. 제주도로 입국한 예맨 난민들이 범죄를 일으키고 우리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며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성소수자나 장애인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 지 오래고, 아동 유튜버에게 ‘벌써 돈 맛을 보면 안된다’며 영상을 유해 콘텐츠로 신고하거나 어르신들을 ‘틀딱충’, ‘할매미’ 등으로 비하하는 아동, 노인 혐오까지 만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많은 혐오가 과연 쓸모 있는 혐오인지, 올바른 곳을 향하고 있는 지를 따져보면 오히려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진짜 분노해야 할 대상은 사회적 약자들이 아니라 약자들 간의 갈등과 대립을 부추기며 자신의 정체는 그 뒤로 교묘하게 숨겨버리는 기득권이다. 성 '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남녀 간의 성 '대결'로 비화했다. 일자리는 청년과 노인, 난민들까지 합세한 의자 뺏기 게임이 됐고, 최저임금 인상문제는 엉뚱하게도 '편의점주 vs 알바생'의 대립구도에 매몰됐다. 자극적인 갈등 상황에 이목이 집중되며 문제의 본질이 흐려지고 핵심적 논의는 관심 밖으로 서서히 밀려났다.


 바야흐로 혐오의 올바른 쓸모를 찾아야 할 때다. 우리 사회에서 혐오라는 단어는 사회적 약자를 규정하고 차별하고 비하하는 데 악용됐다. 그러나 본래 혐오의 사전적 의미는 ‘싫어하고 미워함’이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대상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고한 사회적 약자들이 아니라, 마땅히 혐오받아야 할 대상을 제대로 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100년 전 혐오의 좋은 예를 경험한 바 있다. 우리 선조들은 민족의 뿌리를 뽑아 일제의 노예로 만들고자 했던 일본에 대한 정당한 혐오감과, 그럼에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3.1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남녀노소, 모든 계층이 하나가 되어 들고 일어난 이 거국적인 민족 운동은 이후 6.10 만세 운동으로 이어졌고,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에 저항한 4.19혁명, 부마 항쟁,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최근에는 국정농단 세력을 끌어내린 촛불 혁명으로 그 정신이 이어져 우리나라 시민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혐오는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제대로 된 대상을 향할 때, 혐오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지키고 사회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목적과 명분이 없는 공허한 분노를 서로에게 쏟아내며 분열하는 것은 100년 전 독립 운동가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대한민국의 모습이 결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소모적인 갈등을 일으켜 이득을 보려 하는 지배세력이 바라는 모습니다. 이제는 혐오의 칼날을 우리 스스로가 아닌 그들에게 겨눌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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