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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Jan 28. 2018

08. R의 티타임


12월 9일

카트만두의 오래된 카페 치쿠사에서





          




당장 지금의 나는... 아까 그 커피숍 야외에 앉아 있었을 때 느낀 건데, 엄청 오랜만에 별생각 없고 나른하게, 아무 걱정 없이 있는 게 되게 오랜만인 거야. 따뜻한 햇살 맞으면서. 그게 너무 반갑고 좋았어.

사실 서울에 살 때는 항상 뭔가가 가득했거든. 엄청 정신없었고, 엄청 복잡했고, 그래서 이상하게 가만히 조용히 앉아있는 시간이 없었고. 그게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항상 그런 시간을 보냈었어.


그리고 이 즈음의 나는, 아마 여행을 오기 전부터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졸업하고 나서, 어쨌든 6월에 졸업심사를 보고, 8월에 졸업식을 하고, 여행을 오기까지 한 3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잖아? 그때 여행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나한테 아무것도 부여하지 않고, 나한테 아무 짐도 두지 않고, 걱정이나 생각도 안 하려고 하고, 어떤 시기와 시기 사이의 빈틈을 두려고 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뭐, 좋아하는 곳도 엄청 많이 가고, 좋아하는 음식도 많이 먹고, 술도 많이 마시고, 춤도 많이 추고. 잉여 시간을 보낸 건데 따지자면, 그게 나한테는 소중하고 좋은 시간이었어. 그리고 이 즈음의 내 관심사였던 거는 아무래도 떠나오는 여행이었고, 그래서 이 여행에서 내가 어떤 것을 생각하고 챙겨야 할지를 많이 생각했어. 이제 대학을 졸업했는데, 다음엔 뭘 하지? 어떤 사람이 되지? 어떤 직업을 가지지? 같은 고민을 오랫동안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염두에 뒀던 시기였어.     







아직도 어른이 된다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더 이상 어리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상하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그 어른이 되어간다는 게 뭔지 모르겠으면서도. 그래서 어쩔 때는 내 나이 스물다섯 이 시기가 너무 좋아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고, 또 어떨 때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기도 해. 근데 나는 스물다섯이 돼서 너무 좋았어 올해가. 좋은 시간이었어.







20대 초반일 때는 내 취향이라는 걸 내가 잘 몰랐다? 취향이 정해지지가 않았던 때 같아.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공간에, 좋다고 하는 음악들, 좋다고 하는 옷들은 되게 많았어. 사실 그런 게 널려있었어, 처음 서울에 갔을 때는. 그땐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내 것인지 아닌 지를 몰랐었지. 근데 스물넷스물다섯 되니까, 정확히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이 생기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생기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내가 좋아하는 옷 스타일이 생겼고 그래서 확실히 달라졌다고 느낀 거 같아.


내 친구 중에 음악을 엄청 찾아 듣는 친구 한 명이 있거든. 걔랑 같이 다니다 보니까, 원래 나도 유튜브로 음악 많이 들었었는데, 그 친구랑 같이 있으면서 이 노래 저 노래 찾아 듣는 게 재미있다는 걸 알았어. 레코드판으로 옛날 음악 듣는 것도 너무 좋고. 그래서 여행 오기 전까지는 한창 레코드로 들을 수 있는 7,80년대 미국 음악들, 팝재즈를 엄청 많이 듣고 왔어. 그리고 좋아하는 장소는 아무래도 이태원에 많지. 내가 춤추러 다녔던 곳들이나, 232도 엄청 좋아하고. 거기서 내 생일파티도 했거든. 그때 마침 거기서 디제이로 들었던 노래도 너무 좋은 거야. 232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소고. 또 여행 오기 전까지 그 음악 많이 듣는 친구 집에서 많이 잤는데, 걔네 집에 아이맥이 있고 오프 스피커가 있어. 그래서 걔네 집에서 음악을 찾아들으면서 술 마시고 자고 그랬는데, 걔네 집도 아늑하다고 느껴서 엄청 좋아했어. 노래는, 좋아하는 거라기보다는... 내가 서울에 있을 때 저녁 6시에 출근했잖아. 이제 9월, 10월이 되니까 해가 짧아지면서, 출근하는 시간대가 해가 질 무렵이었다? 내가 그 무렵에 <Morning Sunrise>라는 노래를 매일 들었어. 그래서 그 노래 들으면 항상 해가 지는 남산 풍경이나, 차가워지는 공기가 생각나.      







나라는 사람 자체가 애초에 바쁘게 살고, 뭔가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쨌든 학교를 다니면서 뭔가를 해내는 시기를 계속 보냈잖아. 뭔가를 성취하고 달성해야 하고, 뭔가를 마무리해야 하는 시기가 분명히 오고, 다시 뭔가를 시작해야 하는 시기가 오고. 그리고 이상하게 항상 힘들었다? 항상 힘들었어. 그리고 진짜 힘들었는데, 막상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내가 뭐 때문에 힘들어했는지도 모를 실체 없는 것들이 많았어. 어쩌면 그게 서울이란 도시에서 살아가는 그 자체였을 수도 있고. 근데 근 1년간은 그 힘듦에서 많이 괜찮아지는 상태가 된 거 같아.


지금은 보류나 빈틈을 두고 있는 시기라고 그랬잖아. 이 시기에는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것도 보류하는 시기란 말이야. 그래서 나에 대해 아무것도 정의하거나 규정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동시에, 자꾸만 나 자신이 생겨난다고 해야 하나, 나 자신이 확고해지는 시기이기도 해. 지금 그런 것들이 혼재된 이 시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나를 가만히 두는 거 같아. 이 시기를 잘 보내고, 이 시기가 지나면 나라는 사람이 누구고 뭘 하고 싶은지를 정하고 싶어.







나는 내가 엄청 느긋하고 나른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또 나는 사랑을 신봉하는 사람이고. 사랑의 힘을 알아서 신봉하게 됐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말은 해도 사실 내가 정말 사랑만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 왜냐면 나도 현실성이 좀 세고 나 자신이 제일 중요하거든. 근데 그런 거 있잖아, 그렇다고 믿고 사는 거랑, 그렇지 않다고 믿고 사는 거랑은 좀 다른 거.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믿고 살고 싶어. 사랑이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믿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사랑은, 각자 서로에게 그 사람밖에 없는 사랑? 그 사람이 유일한 사랑? 어쩌면 내 인생의 지향점일 수도 있지. 내가 맨날 그러잖아, 나는 좋은 사람 있으면 그냥 결혼하고 싶다고. 그게 맥락을 같이하는 얘기들이야. 그런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하고 평생 살고 싶어. 그 사람만 있으면 되는?







스물다섯의 나는, 조금씩 내 스타일을 만드는 거에 관심이 생겼고, 근데 지금 여행 중이고 앞으로 정말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어서 구체적으로 말을 할 수가 없어, 상황이 상황인지라. 근데 그건 있어, 정말 원 없이 해보고 싶은 만큼 많이 떠돌아다녀보고 싶다는 생각.


단순하면서도 포괄적인 얘긴데, 내가 원하는 건 결국에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그 시간이란 게 사실 엄청 많지, 그냥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좋은 공간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냥 좋은 순간들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어. 지금은 여기가 너무 좋다.







어쨌든 앞으로 나랑 같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너잖아. 너도 좋은 시간이 됐으면 좋겠고, 나도 그렇고. 둘 다 원 없이 뭔가를 많이 해봤으면 좋겠어.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거리낌 없이 했으면 좋겠고. 끝.








R’s PICK



카페&바 232

https://store.naver.com/restaurants/detail?id=38642149

음악 Weldon Irvine - Morning Sunrise

https://youtu.be/1EuQGnOUX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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