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10월의 Fort Benning, Georgia.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단연 가을이었고, 이곳에서도 어렴풋이 단풍 냄새와 선선한 바람을 기대했지만, Fort Benning의 10월은 여전히 여름 한가운데였다.
불볕더위, 땀으로 젖은 군화, 매캐한 흙먼지, 끊임없이 쏟아지는 고함 속에서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과연 내가 원했던 길이었는지 의심했다.
총 대신 서류를 들고 살아온 인생에서, 갑자기 철모와 소총을 짊어진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낯설고 거칠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힘들었던 건, 그 혼란 속에서 나의 ‘고요’를 지키는 일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질서, 논리, 규칙들이 통하지 않는 세계. 정해진 절차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계급이고, 감정보다 앞서는 것은 명령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무질서 속에서 나는 또 다른 ‘질서’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의 세계는 명확했다. 책임은 무겁고, 규칙은 단단했고, 법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삶의 구조’였다.
군이라는 조직은, 작고 단순한 실수조차도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조용하지만 팽팽한 긴장 속에 존재하는 세계였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 안에서, 다시 법정에 섰다. 이제는 군복을 입은 채로.
그곳의 법정은 민간 법원과는 또 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군복을 입은 피고인, 군복을 입은 판사, 군복을 입은 검사인 나.
이곳에서의 정의는 단지 이론이 아니라 ‘동료의 생명’을 지켜내는 일이었고, 나의 목소리는 이제 법을 넘어, 국가, 동료, 그리고 조직을 향한 책임이 담겨야 했다.
아직도 나는 완전하지 않다.
그저 매일 법정에 서기 전, 군복을 가다듬고,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조용히 되뇔 뿐이다.
“흔들려도 괜찮다. 하지만 무너지진 말자.”
첫 임지에서 처음 맡은 사건은 단순한 음주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안엔 한 병사의 무너진 생활과, 그를 둘러싼 분대의 균열,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책임의 무게가 가라앉아 있었다.
술에 취해 상관에게 폭언을 했다는 단순한 사실 너머에는 그가 왜 그렇게 무너졌는지, 무엇이 그를 그 벼랑 끝으로 몰고 갔는지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 있었다.
나는 보고서를 읽으며 그 병사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역시 처음에는 소명을 품고 입대한 누군가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무너졌고, 누군가는 그를 ‘문제 병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제 그를 판단하는 위치에 내가 있었다.
법대로라면, 징계는 명확했다. 군 규율은 강하고 단단해야 하며, 예외는 조직을 약하게 만든다.
그날 밤, 자대 밖 벤치에 조용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한쪽엔 별이 총총했고, 다른 한쪽엔 야간 행군 준비로 분주한 병사들의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군복을 입은 법률가.
그 모순된 조합 속에서 나는 오늘도 조금씩, 조용히, 나만의 고요를 지켜내고 있었다.
어느 날 오피스로 출근하던 중 내 개인 휴대폰으로 워싱턴 D.C. 지역 번호에서 걸려온 낯선 전화를 받았다.
평소라면 사무용 폰이 아닌 이상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지만, 같은 번호로 두 번이나 전화가 와서 결국 받게 되었다. 전화를 건 곳은 워싱턴 D.C. 에 있는 법무병과 인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게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전했다.
한국은 미국에 이민 와서 20년 만이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