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형량을 줄이기 위해 피고인의 인격과 38년 군 복무 경력, 그동안의 업적을 이야기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에서까지 날아와 증언했다.
피고인 쪽 증언들이 끝난 후 나는 피해자가 쓴 편지를 대독 했다.
그 편지 속에는 사건 이후 생긴 트라우마,
학교와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현실,
모든 남성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흠칫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재판 중에는 증언을 거부했던 피고인이 직접 statement를 하기를 원했다.
군 정복을 입고, 가슴에는 수많은 표창 리본을 단
38년 경력의 나이 든 장교가 방청석에 앉은 지인들 앞에서 울먹이며 가슴을 치고 피해자에게 사과했다.
그 순간, 나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곧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내 행동이 피해자에게 그렇게까지 영향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의도도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말이 되는 말인가.
만약 그의 딸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가해자가
“나는 네가 그렇게까지 아파할 줄 몰랐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고, 좋은 의도였다.”
라고 말한다면, 그는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sentencing 증언이 끝난 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판사를 바라봤다.
“Your Honor,”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안에는 단단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딸뻘의 어린 한국인 여학생을 상대로 한 범행입니다. 피해자는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학교와 사회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고,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움찔합니다. 그 고통은 오늘 이 법정이 끝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법을 어긴 범죄가 아닙니다. 신뢰를 배신하고, 힘의 우위를 이용한 범죄입니다. 법은 피해자의 편에 서야 하고, 그 피해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강력한 처벌을 내려주십시오.”
그 순간 법정 안은 숨소리마저 잠시 멈춘 듯 고요해졌다.
판사는 잠시 휴정을 선언한 뒤 법정을 떠났다가,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판사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넘겼다. 법정 안은 정적에 잠겼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그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피고인,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
피고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정복의 리본과 훈장이 법정의 조명 아래 반짝였다.
판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형량을 읽기 시작했다.
“이 법정은 다음과 같이 선고합니다. 피고인은 불명예제대(Dismissal)를 선고받으며, 연금을 포함한 모든 군 복무 관련 혜택을 박탈한다. 또한 60개월간 군 교정시설에서의 징역형에 처하며, 연방 성범죄자 등록 명단에 영구적으로 등재한다.”
그 순간, 피고인 측 방청석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몇몇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몇몇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그것을 드러낼 수 없었다.
법정이 산산이 흩어지기 전, 나는 피해자를 데리고 조용히 법정을 빠져나왔다.
군검찰 건물 복도를 걸어 내 오피스로 향하는데, 소식을 들은 동료 군검사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오피스 문을 닫자, 그제야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리고 길고도 힘들었던 여정을 함께 끝냈다는 안도감에 작게, 그러나 진심으로 “이제 다 끝났습니다. 안심하셔도 돼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눈가가 붉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두려움이 더 이상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녀가 이 사건의 무게에서 하루빨리 자유로워지기를.
법정 밖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그날만큼은 깊고 고요한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
마치 바다 밑에서 오랫동안 숨을 참다, 마침내 수면 위로 올라와 첫 숨을 마시는 순간처럼.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