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2주간의 한국 일정을 마치고 하와이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곧바로 필리핀 파병 준비에 들어갔다.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마치고 군장과 개인 짐을 꾸리며, 다시 그 지옥 같은 동남아 정글에서 전투복과 군장을 메고 생활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행복하고 온갖 감정들이 벅차올랐다.
무거운 방탄 헬멧과 방탄복은 몰래 빼버리고 싶었지만,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말에 결국 다시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헬멧과 방탄복을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파병 당일 밤, 우리는 공군기지로 이동하기 전 한 장소에 모여 밤을 새우며 대기했다. 짐을 한데 쌓아두고, 전투식량으로 저녁을 때우며,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고에서 밤을 지새웠다.
새벽 무렵, 수송 버스와 트럭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짐을 먼저 실은 뒤,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뜨거운 버스에 꽉꽉 몸을 채우고, 버스 무게까지 달아본 뒤에야 Shafter 공군기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30~40분쯤 달려 기지 안 공항에 도착했을 때, 이미 모두 지치고 배고프고 졸린 상태였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공항 바닥에 드러누워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나 또한 장교 훈련소 시절 이후로는 잊고 지냈던 기절 하듯 앉아서 조는 경험을 다시 하게 되었다.
아침이 밝자, 우리는 밖으로 나가 한 사람씩 공군 수송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다행히 조종사석 가까운 앞쪽 자리를 배정받아 다리를 뻗고 갈 수 있었지만, 체구가 큰 다른 군인들은 비좁은 자리에 웅크린 채 앞으로 15시간이 넘는 비행을 버텨야 했다. 게다가 중간에 괌에 들러 해병들을 태우고 가야 했으니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자리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지만, 막막한 기분은 감출 수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모두 기절하듯 잠들었다. 나 역시 미리 준비한 멜라토닌을 삼킨 뒤, 책을 조금 읽다가 그대로 책을 든 채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금 깨달았다, 그 어떠한 인간의 욕구보다 중요한 건 ‘잠’이라는 것을.
나는 그렇게 겨울잠, 아니 여름잠에 빠진 곰처럼, 15시간이 넘는 비행 동안 배가 고파 잠시 깰 때를 제외하면 그대로 기절한 채 필리핀까지 날아갔다.
그리고 필리핀 공군기지 활주로에 내리자마자,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엄청난 더위와 습기가 우리를 덮쳐왔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자는 사이 비행기가 추락해서 지옥에 떨어진 건 아닐까.”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