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정글에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한 소식이 전해졌다. 필리핀 군법무관들이 미군 법무관들과 함께 Legal Symposium을 열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내가 다루어 달라는 여러 법 주제들의 리스트를 받아 들고, 걱정이 앞섰다. 원래도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이 지역에서 미국 군법무관은 나 혼자뿐이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다행히 예전에 군인 교육 때 사용했던 자료들이 남아 있었기에 이것저것 짜깁기하며, 또 새로운 자료를 찾아가며 준비를 시작했다.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Symposium 전까지 준비했다.
마침 마닐라에 파견 나와 있던 친구 법무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 친구를 포함해 두 명이 더 합류해 주기로 했다.
Symposium 당일, 나는 부대에서 내준 밴을 타고 행사장에 도착했다. 필리핀 군측의 극진한 환대에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들었다.
친절한 필리핀 군인 분들과 시원한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건물, 전투식량만 먹다가 오랜만에 맛본 필리핀 전통 음식들과 얼음이 가득한 시원한 물. 그곳은 말 그대로 천국 같았다.
만찬이 끝난 뒤, 마닐라에서 도착한 두 명의 미군 법무관들과 함께 발표 준비에 들어갔다.
나는 첫 번째 발표자였다. 필리핀 군 고위 관계자들과 군법무관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떨리고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바다 위에 떠 있는 해파리를 떠올리며 심호흡을 하고 단상에 올랐다.
그다음부터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준비한 발표들을 무사히 끝냈고,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 특히 질문이 많이 이어졌다는 것만은 뚜렷하다.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발표가 모두 끝난 뒤, 기념촬영과 함께 선물을 교환하는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따로 준비한 선물이 없었기에, 내 군복에 달린 패치를 떼어 몇몇 분들에게 드렸다. 계급 높은 분들이 나에게 관심을 보여주셨는데, 아시아인인데도 미군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던 듯하다.
행사가 끝나고 두 명의 법무관은 뒤풀이 자리에 남았지만, 나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마침 훈련 중이라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실제로 회의는 있긴 했다). 그렇게 나는 먼저 텐트로 돌아왔다.
내 필리핀 파병 기간 중, 그날이 가장 좋았던 날이었다. 그 외의 날들은 기억하기도 싫다. 말 그대로 무더위와 습기와의 싸움이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군복이 땀으로 흠뻑 젖는 경험, 그런 더위는 처음이었다. 파병을 마치고 하와이로 돌아왔을 때, 그곳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원래는 하와이에 1년을 더 있어야 했음에도, 또다시 필리핀으로 보내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컸다. 결국 내 모든 인맥을 동원해 한국 발령을 받아냈다. 또다시 한국을 간다는 건 내 군 커리어에 좋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나의 결심은 굳건했다.
몇 달 동안 한국으로의 이사 준비와 여러 절차들을 마친 끝에,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졌다.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그 시기의 나는 몸과 마음이 무너진 상태였다. 태어나 가장 힘들었던 시절 중 하나였다.
그래도 하와이에 남을 수는 없었다. 나는 반드시 한국으로 가야만 했다.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