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는 말라도 죽지 않아

종이에 눌러 박제된 잉크는 활자로 남아 결 사이에 뿌리를 박고 숨 쉰다.

by Dichterin 여자시인

잉크는 말라도 죽지 않아



내친김에 종이를 조금 더 소비해보기로 하였다.

여전히 새로운 노트를 찾는 일은 진전이 없다.

바라건대는 새 노트에는 정말로 조금 더 성실하게 근면하게 성찰하고 또 욕심 내 보자면 보다 더 나은 문장들로 쓰고 싶다. 잉크병이 바닥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싶기도 하다. 이다음 번에는 고동색 같은 색깔의 잉크를 구해다 써 볼 참이다.


나무가 가진 두 가지 색은 모두 멋진 색이다.

초록과 갈색 이 두 색은 서로 섞여도 근사하다.

초록색 잉크를 쓸 생각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없지만 갈색은 언제나 환영한다. 나무에서 난 종이에 나무에서 난 색으로 쓰는 일은 황홀할 테다. 서로는 서로를 찾게 될 텐데 나무가 나무를 찾아 다시금 서로 하나가 되는 일이다.


노트를 펼치고 소리 내어 찾아 읽는다.

화석은 되살아나서 글자들은 제 자리를 찾아간다.

말라 빛바랜 잉크는 생기를 얻어서는 죽은 적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서 춤을 춘다. 벌레는 말라죽었는데 잉크는 말라도 죽지 않는다. 펜이 뿌리고 가는 자국들이 그대로 자꾸 새로 시를 낳는다 죽기는커녕 낳고 또 낳는다.


노트 위를 활보하다가 뒹굴다가 또 조금 잠잠해지다가 다만 죽지 않는다.

지금 나는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고 나무들 틈에서 나무 위에 글을 새겨 넣고 있다.

종이는 잉크의 무대, 펜은 잉크를 지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