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장 맨 아래칸에 묵혀둔 오래된 손뜨개 스웨터를 꺼내듯이
브런치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작가’라고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는데 말이다.
그 외에 이런저런 메뉴들에 입힌 이름들도 하나같이 작가적 감성이 충만하다. 자기 브런치 페이지에 들어오면 자기소개 대신에 ‘작가 소개’라고 해주질 않나, 글을 모으게 되면 그것들은 무려 ‘작품’이라는 섹션에 고이 리스트업 된다. 게다가 내비게이션 메뉴를 펼치면 ‘작가의 서랍’ 이라던지 ‘글 읽는 서재’ 라던지 글쟁이들의 ‘갬성’을 있는 대로 건드려주는 것이다. 이쯤 되고 보니 정말 브런치는 작정하고 이러나 싶다. 대상자들의 욕망을 가장 정확하게 건드리고 그걸 가장 구체적인 단어로 드러내 주면서 거기 빠져 빼도 박도 못하게 하려는 심사가 아닐까 싶을 만큼 말이다. 죄다 허영이라면 허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이런 이름들, 브랜드들 같은 것이라지만 또 진짜 책도 내고 저명해지는 작가가 아닌 나 같은 얼치기들에게는 그런 허영이 매우 중하다. 허영은 자존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없는 사람일수록 자존심에 기대어 살듯이 서푼짜리도 안 되는 한 줌 허영을 오늘도 나는 분첩에 찍어 얼굴에 덧바른다.
그중에서도 특히, 같은 뜻이라도 ‘임시 저장함’ 보다는 ‘작가의 서랍’.
작가들의 충만하고 여린 갬성에 촉촉한 봄비를 적셔주는 아주 탁월한 네이밍이 아닐까 싶다.
대학시절 같이 수업을 듣던 여학생이 제법 빈티지한 굵은 짜임이 들어간 카디건을 입고 강의실에 나타났다.
그녀에게 이런 옷들은 어딜 가서 사느냐고 물어보았고 그녀는 그 옷가게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곳은 보세 옷을 취급하는 곳이었는데, 가게 이름이 <엄마의 서랍장>이었다. 거기서는 보세 옷들 중에서도 주로 구제, 복고풍 옷들을 취급했고 마치 엄마의 서랍장에서 꺼냈음직한 옷들을 판매하고 있었으니, 제품의 콘셉트와 너무 잘 어울리는 상호명이었다. 심지어 거기 옷을 사러 들어오는 여자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아늑하고 아스라한 추억을 소환해 주고도 남을 것 같은 탁월한 작명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발행하지 않은 ‘미발표 원고들’을 담고 있는 곳이 브런치의 ‘작가의 서랍’이다. 그래, 기왕 이렇게 작가 놀이를 할 거라면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이름난 저명한 작가들이 본다면 없이 사는 천한 것들 이러려나? 그래도 아무렴. 그래, 내게는 아직 ‘미발표 원고’들이 제법 되고 ‘구상 중인 초고’들도 꽤 있다. 이건 진짜다. 나는 그 글들을 양피지에 적어 넣고 둘둘 두루마리에 말아 마호가니 서랍장에 켜켜이 야무지게 쟁여놓았단 말이다. 이따금 그 서랍장에서 서랍들을 층층이 다 꺼내어 내용물들을 위하여 환기도 시켜주어야지. 좀이 슬지 말라고 나프탈렌 알맹이들도 몇 개 까서 넣어줘야 하려나, 아니 습기에도 취약하니 ‘물먹는 하마’ 같은 것도 귀퉁이에 하나씩 넣어줘야겠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여 나는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벌써 한 두 주일 전에 ‘작가의 서랍’에 넣어 둬 놓고 오늘에야 슬그마니 꺼내어 이렇게 매만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어디 가서 임시 저장함 내지는 임시 보관함이라고 하는 다른 플랫폼에서는 글 못쓸 것 같은 생각이다. 입이 고급이라 생선 중에서도 손으로 가시 발라 준 윤기 나는 흰 살만 먹는다는 누구네 집 고양이처럼 순 눈만 높아져서는 말이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이 작가의 서랍도 그렇게 되려나 하는 생각 말이다. 온갖 어둡고 추악한 욕망들이 빠져나가고 맨 마지막 희망만이 남은 채로 황급히 닫혀버린 판도라의 상자처럼, 내 작가의 서랍에서도 온갖 욕망과 치기 어린 순 얼치기 선무당의 잡가 같은 그런 글들이 넝마 조각들처럼 바람에 흩날리고 ‘가장 나종 지니인’ 희망만이 남겨져 있을까 싶다. 그런 희망이라도 남아있어 주면 하는 희망이다.
가끔씩 기숙사를 개방하는 오픈하우스라는 것처럼, 우리도 얼마에 한 번씩은 작정하고 서랍 개봉식 같은 것을 해보면 좋겠다. 그냥 임시저장 상태에 있던 글들을 다시 다듬어서 업로드하는 것 말고 말이다. 정말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아직 서랍에 고이 모셔있는 그 상태로 말이다. 심심풀이라 해도 좋다. 브런치 작가들끼리 릴레이로 지금 자신의 작가의 서랍을 캡처하거나 하는 식으로 해서 자기 서랍을 오픈하는 것이다. 이 오픈의 목적은 뭐 거창할 것 없다. 정돈되지 않은, 감성을 그냥 한번 까보이는 것이다. 좀처럼 글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식으로 까발리면서 어떤 자극을 받을 수도 있을 테고, 더러는 관음증적 호기심을 채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나의 서랍장 속 글 뭉치들의 안부가 궁금하면서도 타인의 서랍장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주인의 허락 없이 남의 서랍장을 열어 볼 수는 없으니 그저 상상만을 해보는 것이다. 대학시절 <엄마의 서랍장>이라는 옷가게에 자주 가서 옷을 사던 그 여학생의 옷장에는 굵은 손뜨개 카디건 말고도 또 아코디언 주름 잡힌 치마도 있을 테고 어깨 패드가 도톰히 들어간 80년대 스타일의 벽돌색 재킷도 걸려있겠지 하고 상상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글을 쓰고 싶어 해서 그런지 몰라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들의 글들도, 그들이 쓰는 글의 가장 날것 그대로인 초기 상태를 엿보고 싶어 진다. 사람들은 완성품으로 나온 작가의 글을 가지고 그는 이런 스타일을 지녔네 어쩠네 하며 평론들을 늘어놓지만, 사실 가장 그 작가의 원초적인 사상과 취향이 녹아있는 것은 그의 초고, 아니 초고 훨씬 그 이전에 그냥 떠오르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들, 그 메모들이 아닐까 싶다.
여러모로 미니멀리즘이 오늘날까지도 그 유행이 식을 줄을 모르는데 글쓰기에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랍장에 글을 잔뜩 쌓아놓고 나는 언제나 아이디어가 차고 넘치지, 마음만 먹으면 뭐든 꺼내어 조금 더 손 본 뒤에 올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든든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워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집착스런 미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나의 서랍이 그런 형국이다. 문장을 미니멀하게 쓰는 훈련에 번번이 실패하는 나는 대신 글감이라도 좀 다이어트를 해서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심도 있는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아이디어들만 떠올라서 까먹기 전에 저장만 해 두고 다시 돌아와 손보거나 그 아이디어를 그럴듯하게 발전시켜나가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고약한 버릇이 들어버린 것 같다.
정말로 작가의 서랍에 들어있는 글들을 그저 ‘임시 보관’ 중인 글로 전락시키지 않고 한편 한편 가치 있고 생명력을 지닌 글들로, 지금 잠시 휴식을 갖고 있거나 준비기간을 갖고 있는 상태의 글들로 만들어주려면 그 서랍장 주인인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서랍을 열고 환기시키면서 도저히 아니올시다 싶은 것들은 솎아내기도 해야겠다. 또 이미 담긴 지 오래인 것들이 있다면 왜 이렇게 묵혀두고 있는지에 대해서 한 번쯤은 성찰을 꼭 해봐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 채 어느 날 다시 생각나서 꺼내봤을 때는 이미 좀이 갉아먹고 지나간 구멍만 뻥 뚫려 회복 불가한 상태가 된 처참한 낡은 스웨터처럼 변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서랍장 제일 아래 칸에 반듯하게 개켜둔 두툼한 겨울 스웨터를 다시 꺼내어 거기 뺨을 대어 보면 느껴지는 특유의 감촉이 있다. 나는 그 감촉에 ‘반가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지금 내 서랍에 잠자고 있을 글들을 다시 소환했을 때, 나는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 반가움 가득 안고 거기에 살을 붙여주고 싶다. 그러려면 내가 지금보다 더 부지런해져야 한다는 것만을 확인한다.
작가의 서랍.
이 서랍은 앞으로도 손이 제법 많이 갈 것 같은데 열 때마다 반갑고 즐겁고 그랬으면 좋겠다. 때때로 미련 없이 잘 비워내기도 하고 또 적절히 채워주기도 하면서 관리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