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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chterin 여자시인 Apr 12. 2022

유리 청소부

[소설습작] 내 등 뒤의 커다란 창문 너머에 그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모니터 액정에 오후의 햇살이 드리운다. 잠깐 눈이 부실 법도 한데 그녀는 눈을 찌푸리는 대신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눈을 더욱 고쳐 뜬다. 옆으로 널찍한 모니터에는 여러 가지 문서들을 띄워놓은 창들로 어지러웠는데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햇살을 받은 화면 위로 제법 커다란 얼룩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중이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오늘은 화창한 축에 드는 날의 오후이니 그냥 다 뭉개진 그림자 정도로 그칠 것이 아니라 선명한 인상을 캐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는 중이다.


벌써 열 달 정도 흐른 것 같다. 매번 더러는 달 초에, 더러는 달 거의 말엽에 있기도 했으나 대체로 두 달에 한 번 꼴로 달 중순경 해서 이 회사 건물의 통유리 외벽에 청소 날이 돌아온다. 안에서 가만 업무에 집중하고 있으면 간간히 마른 유리창에 무언가 액체를 조금 머금은 걸레질을 하는 특유의 소리가 전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흠칫하고 뒤를 돌아보면 등지고 앉은 커다란 창문에 때로는 한 명, 때로는 두 명의 유리 청소부들이 로프에 매달린 채로 열심히 유리를 닦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남자를 처음 본 것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그 남자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반년쯤 전의 일이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회의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아서 남은 문서들을 작성하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었고 회전의자를 잠시 돌려 창밖의 햇살을 보려고 했을 때, 한창 거품을 묻혀 훔쳐내고 있던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늘어지개 기지개라도 켜고 어쩌면 하품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지불식 간에 서로를 쳐다보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멋쩍어서 곧장 자리에 앉아 창문을 등지고 타닥타닥 타자를 치는 일에만 열중했었다. 하지만 돌려 앉느라 차단된 시각을 제외한 그녀의 모든 다른 신경은 온통 등 뒤에 있는 통창 너머 로프에 매달린 그 청소부에 쏠려있었다. 꽤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던 창문 걸레질하는 소리가 그녀가 돌아 앉은 이후로 얼마 동안 멈춰버렸기 때문에 그녀의 신경은 더욱더 지금 등 뒤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를 어떤 사건을 그녀만이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다시 걸레질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고 그녀는 모종의 안도감을 느낀 채 뒤 돌아보지 않은 채 마저 오후의 업무를 처리했다. 대부분이 통유리로 외벽을 마감한 고층건물들로 빼곡한 도심의 업무지구에서 유리 청소부를 보는 일은 흔했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일이다. 그들은 아주 열중한 얼굴로 진지하게 제법 위험하기까지 한 그 일을 해냈고, 그들이 닦고 있는 커다랗고 빛나는 유리창 안쪽에서 두둑한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이들 역시 반쯤은 짓눌린 얼굴들로 그들의 일을 해내고 있었다. 다만, 유리창 안쪽에서 의자에 앉아 일을 하고 있다는 점만을 제외한다면, 로프에 매달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화이트칼라들의 일 역시 언제 어떻게 잘려나갈지 모른다는 점에서 제법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고 그런 유리 청소부들 중 한 명에 불과했을 그 남자와 몇 초간 이루어졌던 시선 교환은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냥 그렇고 그렇지 않았다. 그렇고 그런 날 오후에 그렇고 그런 회사 건물들로 즐비한 곳에서 그렇고 그런 유리청소라는 일을 해내는 그렇고 그런 인부들과 그 유리창 안 사무실에서 그렇고 그런 일을 해내고 있는 그렇고 그런 회사원들. 뭐 그런 정도의 그렇고 그런 일들 뿐인 하루였는데, 그 하루 중 한 토막의 아주 찰나의 순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만났다는 정도. 그마저도 그렇고 그런 일상적인 일일 텐데 말이다. 그녀는 그 일이 있고서 한동안 그 그렇고 그런 일에 대해서 왜 그게 그렇고 그렇지만은 않았는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었다.


다른 어느 장소에서도,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다른 어떤 남자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한 어떤 확실한 인상을 그 남자의 두 눈이, 더 정확히는 그 두 눈에서 나오던 눈빛에, 그 빛의 결에서 묻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직감했다. 그 남자가 뛰어난 미남 자였다거나 하는 식의 특출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순간에 피로에 절은 직장인의 한 구석을 아무 여과 없이 고스란히 들켜버린 그 순간에. 그런데 그런 눈을 한 남자에게 바라봐지고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주 아주 짧은 교류였지만 그 눈빛에서 그녀는 아주 깊은 이해를 받고 있다는, 어쩌면 아주 짧은 위로 같은 그녀가 제멋대로 해석한 인상에 불과하다 해도 꼭 그런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도 그녀는 그 남자와 한 번 더,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조금 더 근거리에서 조금 더 사적이라면 사적이라 할 수도 있을 만큼의 조우가 있었다. 그녀는 한 날에는 탕비실에서 커피를 한 잔 내려서는 라운지 쪽에 벽과 창틀 사이쯤 되는 곳에 등을 기대고 서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이어폰을 꽂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휴게시간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커피를 절반쯤 마셨을 때, 문득 그녀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상체를 약간 틀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얼굴을 들었을 때, 그녀는 창유리 하나 정도 떨어진 옆 라인에서 로프를 탄 채로 그녀를 내려보던 그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찡긋거림, 어색한 미소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그저 매우 침착하게 어떤 감정도 딱히 실리지 않은 매우 중립적인 시선이 그녀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지난번처럼 몇 초 만에 시선을 떨구고 등을 돌리는 대신 자신도 마찬가지로 그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기로 했다. 귓가에는 여전히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녀의 양손이 거머쥔 커피잔의 온기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도 한쪽 귀에 무언가를 꽂고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청소팀 사람들이 귀에 꽂고 있는 무전기 같은 용도의 블루투스 호출기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정말로 동료나 팀장 같은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순간 남자는 그걸 꽂은 쪽 귀에 손가락을 갖다 대더니 무어라고 짧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자는 다시 천천히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로프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그 남자가 점점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가자 이번에는 창문가에 가까이 바짝 다가서서 점점 내려가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남자는 내려가는 동안 다시 위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남자가 쓰고 있는 헬멧, 남자가 타고 내려가는 로프, 남자의 몸에 매달려있는 이런저런 도구들, 그런 것들이 작은 점들처럼 보이자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창문가에서 멀어져 나왔다. 골몰히 생각에 잠겨있던 그녀는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거푸 톡톡- 하고 두드리는 통에 다시 정신을 차렸는데, 그때 그녀는 상대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눈을 찌푸리며 집중하려고 하던 순간 상대는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는 모션을 취했다. 그제야 그녀는 아직도 자기가 노래를 듣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옆 부서에서 일하는 동료였다. 





그런 식의 짤막한 조우들이 있으면서 그녀는 점점 이 남자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유리 청소부들이 올 것 같은 주간이면 그녀는 우연을 가장한 그런 식의 마주침을 위해 괜히 조금 더 옷차림에 신경을 쓰곤 했다. 오늘만큼은 지난번의 그런 날들보다는 조금 더 해가 길고 청명한 날이니, 그녀는 데스크톱 화면에 반사된 청소부를 보고 있기 좋은 그런 날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의 윤곽 같은 것들을 조금 더 잘 살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계산이었다. 벌써 몇 달째 똑같은 그 남자 말이다. 


한 번쯤 뒤돌아 눈이라도 맞춰 볼 법도 하지만 오늘만큼은 왠지 그럴 마음까지는 서지 않고 있다. 그저 이렇게 울렁대듯 일렁이듯 그렇게 그림자 지듯 화면에 드리우는 그 남자의 존재를 조금 더 엿보고 싶다. 엿본다는 동사를 쓰면서도 사실은 느끼고 싶은, 그녀는 오늘 그런 마음이다. 그도 그녀를 청소를 가장해놓고 매번 조금 더 엿보고 싶어 하는 중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이 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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