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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chterin 여자시인 Apr 09. 2022

호상(好喪)

소설 구상 | 왜 다들 먼저 죽고 지랄들이여! 장수 노인의 호상 프로젝트


이눔들아, 애비 앞서 가느라 좋으냐!
원원원... 암만 날 때 순서 있어도 갈 때는 순서 없기로서니.
예끼 눔들, 장유유서도 모른단 말이더냐!
나만두고 다 가버리니 그래 좋더냐아아아아!!!



최노인은 오늘도 장례식장에 와 있다.

한바탕 장례식장 옥상에 올라가서 사자후를 내지르고 내려오는 참이다. 이제 도저히 화딱지가 나서 못 견디겠다. 이렇게 울화병이란 울화병은 진즉부터 나있는데도 왜 나는 안 죽고 하루하루 자꾸만 사느냔 말이다.


최노인 평생에 이번이 대체 도합 몇 번째 장례식이던가. 이 장례식은 다름 아닌 최노인의 막내아들의 장례식이다. 이로써 노인의 여섯 자녀들은 모두 그를 앞서갔다.


지금껏 살며 다녀본 장례식이 결혼식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그에게는 갈수록 점점 더 참석하는 장례식이 많아지고 있었다. 자식들의 장례식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이 자기 삶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장점적인 측면은 줄어들고 죄 단점들만 남은 것 같아 그는 만사에 베 꼬여있다. 


그의 부인도 진즉에 죽어 없고 친구들도 죄 다 죽었다. 

사촌이나 친척들도 동년배는 물론이거니와 그 손아랫 세대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여섯 자식들마저 다 죽고 손자들도 죄 앓는 소리 내는 중늙은이 대열에 합류한 지 오래고 그 증손자들은 영 세대가 너무 달라놔서 어울리기도 그렇고 명절에 세배하러 오는 게 다라 해도 아무 재미도 없다.


아무리 많이 쳐준다 해도 끽해야 80세 정도로밖에는 안 보이는 최노인은 사실 올해로 132세를 맞이했다. 징글맞게도 오래 살았다. 매스컴 취재 따위도 다 물리친 그는 특별대우 따위는 그런 식으로 받고 싶지 않다고 해놓고서 등 돌리고 돌아앉아 세상을 경멸하는 중이다. 그래도 지원금은 올려 받고 싶어서 지자체의 금전적인 특별대우를 받는 중에 있다. 간혹 병원이나 관공서 등에서 신분증을 확인할 때면 접수원들이 놀라곤 하는데 그때 마다도 그는 역정을 내거나 눈알을 부라리면서 '쉿- 조용하라고!' 라며 상대를 다그치기 일쑤다.


노인의 주변에 이제 남은 이들이 얼마 없다. 물론 따지고 보면 증손자에 고손자 등 자손들이야 왜 없겠냐마는 최노인과 가까운 사이였던 이들이 다 죽고 없어진 뒤 그는 상실감과 싸우는 중이다. 매일 밤 자기 전 그가 간절히 비는 소원은 부디 내일을 맞이하지 않는 것이다. 


빌어먹을 질긴 목숨. 나도 이제 좀 죽고 싶다. 제발 좀!
이 풍진 세상 더러운 놈의 꼴들만 봐놔서, 나 좀 어여 데려가라고. 제에바아아아아알!!!








어느 날 새벽녘부터 노인의 집 주변으로 차들이 들어섰다. 

그의 집 앞에는 조등이 걸려있다. 집안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나와서 일사불란하게 주변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차량들을 교통정리시키고 차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히 내리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드디어 소원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징하디 징하게 살아온 세월의 햇수만큼이나 많은 조문객들이 빈소를 찾았다. 그들은 대부분 노인의 자손들의 지인들이었다. 더러는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나 방송국 관계자들도 다녀갔다. 하기사 그렇게 오래 살다 죽은 사람이 있었으니 화제를 몰 법도 하다. 그토록 원하던 죽음을 그제야 맞이한 노인은 관속에 누워 평안히 영면에 들었을까?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고인의 죽음에 대해 한 마디씩 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다들 호상이라고 했다. 

한 사람의 지루하게 긴 인생이 끝나고 난 뒤, 더는 그 길고 긴 삶을 역추적하거나 반추하며 기려 줄 이는 없어진 모양새다. 고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세대마저 이미 고인을 앞서 애저녁에 세상을 하직한 터라, 이제 고인의 죽음으로 가문의 크고 골치 아픈 일 한 개를 해치워버린 자손들만이 후련한 마음으로 만연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띄운 채 밀려드는 조문객들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최노인의 죽음은 정말로 호상이긴 한 것이었을까 와 같은 의문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정작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길고 긴 132년의 삶이 세 자리 숫자로 남았다. 빈소는 여전히 제법 떠들썩한 가운데 벗어놓은 조문객들의 구두들이 주인들을 기다리며 현관을 빼곡히 채우고도 남아 보였다. 그 집안 몇 대 손일 지도 모를 어린아이들이 과자값을 받는 대신 짝 맞춰 신발들을 훨씬 그 밖에까지 줄지어 가지런히 세워놓는 일에 한창이었다. 







<작가의 변>

이 이야기를 얼추 이 정도까지 밖에는 생각해내지 못한 상태이다. 

참 이상도 하지, 벌써 몇 년 전 뜬금없이 한여름 여행길에 오르는 비행기에 탑승하여 이륙 전까지 물밀듯 들어오는 다른 승객들을 보고 있던 와중에 이 이야기에 대한 주요 장면들이 떠올랐더랬다. 징하게 오래 사느라 그 사이에 자식들까지 죄다 앞세워 보낸 장수한 노인이 매일 밤 잠결에 눈감게 해달라고 비는 코미디 같은 장면이 눈앞에 선했다. 


나는 이 소설의 시작부와 마지막부에 총 두 번의 장례식을 언급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주인공 최노인의 막내아들 장례식에 참석해서 하나 남았던 여섯째 자식마저 앞세우며 악에 받친 그의 모습을 보여주되 마지막에는 자기가 그토록 원했던 자신의 장례식을 사람들이 호상이라고 치켜세우며 짐짝 치우듯이 치우며 후련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단은 그런 두 장면을 먼저 크게 생각해 놓고 있는 중에 있다.

소설 쓰기는 농사짓는 것 보다도 더한 중노동 같다. 지구력도 인내력도 모두가 다 시험대 위에 오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이 이야기 속 최노인은 어떤 삶을 살았던 인물로 그려질 것인가? 내가 생각해 낸 이야기면서도 내가 다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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