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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chterin 여자시인 Aug 04. 2022

당신의 브런치는 어떤 결을 하고 있나요?

이탈하는 구독자를 보는 자세




언제부터인가 '결'이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었다. 

관계의 결, 삶의 결, 성격의 결, 기타 등등. 저 사람은 나와 결이 같다, 다르다 라는 식으로 누군가와 나 사이의 성향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결은 피부결, 머릿결, 비단결 같은 단어에서나 보았는데 말이다. 




이 글을 쓴 뒤로 몇 달이 더 흘렀고 그사이 내 브런치의 구독자 수는 200명을 넘기게 되었다. 그중에는 상호 간에 글들을 빈번히 읽는 작가님들이 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구독자 수는 내게 보람 같은 것을 선사했다. 말 그대로 누군가에게 내가 이곳 브런치에서 쓰고 있는 글이 구독을 해 가면서 읽을만한 가치를 주었거나 흥미를 유발했거나 맞구독을 유도하는 선방적 제스처였거나 저마다의 이유로 내 브런치가 선택받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관심종자인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나도 쓸모 있을 수 있다.


라는 기분이 나를 살아있게 했다. 

희망적이었다.


내 브런치를 구독하는 사람들과 나 사이에는 모종의 공통점 같은 것이 있을까? 나의 글들이 누군가의 마음속 강물에 잔잔히 흐르는 물결에 맞추어 떠가는 조각배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내 글들을 더 이상 읽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물결을 내가 거슬렀기 때문인 것일까?


나의 브런치는 어떤 결을 하고 있을까? 아니, 나의 글들은 어떤 결을 하고 있을까?

나는 어떤 결을 가진 글을 쓰고 싶은 걸까? 그리고 어떤 결을 가진 글들을 써 왔던 것일까?

글을 쓰겠다고 맨 말로만 설쳐놓고서 정작 나는 이런 질문들은 스스로에게 한 번도 던져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쓰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내가 글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논조나 기조, 흐름, 관통하는 메시지 이런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노선이 모호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와서, 나는 누구인가


결에 대한 질문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진부한 질문이 되어버린 '나는 누구인가?'로 다시 돌아와서 여기에 대한 나름의 소신이 정리된다면 그래서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스타일이고 어떤 사유를 하고 그것들을 어떻게 글이라는 매체로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도 가름이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가장 진부하면서도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 대한 사유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섣부른 판단을 너무 쉽게 해 버렸을지도


결은 이곳 브런치에 올리는 글들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댓글에도 묻어난다. 

구독자들을 얻었다면 어쩌면 내가 읽는 많은 작가님들의 글들에 내 나름 진정성 있게 남긴 댓글들을 매개로 일어난 일일까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잃어버린 구독자들도 내가 남긴 댓글들로 인하여 그럴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넘어선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글을 읽고 나서 거기에서 무엇인가를 느꼈거나 하면 그걸 댓글로 남김으로써 좋은 작품에 대한 내 나름의 예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제 아무리 칭찬이고 찬양이라 했을지언정 그것 역시 판단과 평가를 내리고 있는 행위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때때로 너무 구체적이니까. 그런 부분들이, 나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 받는 입장에서 보면 세세하게 평가당한다는 부담감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판단을 하면 판단을 받고, 판단하지 않으면 판단당하지 않는다.


이 간단한 명제를 자주 잊는다. 

이런 점들도 결을 같게 하거나 달리 하게 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유의미성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미를 갖게 하는 글이다.

이것이 내가 추구하고 싶은 내 글의 결이라고 해 두자. 


지금까지 나의 글들은 내 개인적 만족을 위한 글들이었는데 그래서 오로지 나에게만 유의미했었다.

하여 타인들에게 의미를 주지 못하여 그들은 나를 떠났을 것이다. 그들이 다른 곳에서는 의미를 찾았기를 바란다. 내가 줄 수 없었던 의미를 다른 글을 통해 획득했다면 대단히 기쁜 일이다. 


유의미성이라는 것은 쓸모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까 싶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 욕망은 유의미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가급적 글도 쓸모 있는 글을 썼으면 싶은데 그러자니 여전히 내 개인적 영달만을 위한 일차원적 자기만족에 천착하는 글만 또 한 편 여기 이렇게 남기고 있다. 


그래서 내 글을 떠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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