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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chterin 여자시인 Jan 07. 2022

잊혀진다는 것

어쩌면 소설 보다는 경수필같은, 하지만 쨋거나 이야기




잊혀져 간다는 것은, 혹은 이미 잊어버려졌다는 것은 아릿함을 동반한다. 반대로 기억한다는 것 혹은 추억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아련함이 함께한다. 당연히 거기 그 자리에 있을 줄로만 알았던 것들이 나의 방관과 '지금은 바쁘니까'와 같은 얄팍한 변명 속에서 정말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 이런 일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부주의했음과 그 상실로 인한 허탈함, 허망함, 또는 자책과 실망으로 인하여 마음을 가눌 길 없게 되기도 하였으리라.

나는 언제부터인가 무엇을 쓰는 사람이고 싶었다. 가급적이면 그 장르는 이야기, 그러니까 소설이었으면 하는, 그 끝에는 마침내 대(大)문필가의 칭호가 붙었으면 하는, 대책 없이 꿈만 큰, 소위 말하는 작가지망생이다. 그리 멀지 않았던 과거에 한동안 꽤 오래 무엇도 할 기력도 의욕도 없던 나날들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무기력했던 시간들을 청산해 보기라도 할 듯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래 전 구상해 둔 글감 뭉치를 생각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옛날에, 한 이십년 가까이 되었을 법한데 이야기를 만들어보려 시도한 원고 초안이었다. 쉽게 찾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만은 명백하여 그 다음 날부터 그것을 찾는 일에 몰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필 초고는 이사를 여러 번 다니는 통에 분명 어찌 되었을 것이고 워드 파일로 어느 정도 입력해 둔 것은 이미 고물이 되어버린 구식 노트북의 하드디스크를 교체할 때 이미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점점 불안이 엄습해왔다. 남은 것은 인물 관계도와 대략적인 시놉시스를 적어둔 종잇장 혹은 노트를 찾는 일, 그리고 정말로 혹시나 하는 기대로 그것을 구상 할 무렵 사용했던 이메일 계정의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일과 아직 USB가 나오기 훨씬 이전 자주 사용했던 하얀색 3.5 플로피 디스크 한 개를 열어보는 일들이었다.

이메일 계정을 찾고자 하는 이유는 혹여나 이메일로 워드파일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느라 전송한 적이 있었을까 싶어서였고 생각나는 모든 비밀번호로 접속을 시도했으나 무리였다. 아이디마저 "존재하지 않는다"고 뜰 뿐이었다. 다음으로는 그 주소로 가입해 사용하던 당시의 한 메신저 프로그램을 찾아 회원정보에 기입되어 있을지도 모를 주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것 역시 그 메신저 서비스는 수년 전에 서비스 종료를 한 지 오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장기 휴면 상태에 있던 모 이메일 계정은 아웃룩과 연동되는 과정에서였는지 받은 편지함의 편지들은 모두 지워져있었다. 이에 질세라 이제는 오기마저 생겨 당시 다른 포털 사이트에 갖고 있던 계정들로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그 포털사이트들 역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없어지거나 합병되어 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내 과거 모든 소중했던 기록들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음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혹 오래된 그 플로피 디스크에는 무언가 들어 있어주지 않을까 싶어 노트북 부품 중 디스켓을 꽂는 기기를 찾기로 하였다. 아무리 찾아도 그것은 나오지 않았다. 거듭 이사를 하는 와중에 더는 소용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버려졌던 것일까. 이제 정말로 남은 것은 그나마 손으로 작성해 놓은 인물소개 및 정리와 주요 사건들을 연대기별로 간략하게 정리해 둔 종잇장을 '발굴'해 내는 것 뿐. 사실 그 모든 이야기의 초안을 상세히 기술해 두었던 노트가 한 권 있었는데 책장 정리 끝에 솎아졌는지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이리저리 흐트러진 책들 더미 속에서 이미 빛이 바랄대로 바라버린 누런 종잇조각 두어 장만을 간신히, 마치 전쟁의 폐허 속에서 죽어가는 생존자를 발견해 내듯이 찾아내었다.

이 모든 일들은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어떻든 크게 소용이 닿아질지도 모를 것들을 그 순간 짐이 된다는 이유로, 이제껏 갖고 있었으니 버릴 때도 되었지 하며 내 손으로 그것들을 치워버렸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만들어두고 나중에 한 번씩 들어와 봐야지 했던 것들은 이미 없어진 뒤였다. 나는 얼마나 냉정하고도 교만했던 것일까! 아낀다고 했던 것, 한때 중요했던 것들이 지금에는 하찮은 것이 되어 아무 생각 없이 매정하게 내쳐진 것, 그리고 언제든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내가 필요할 때마다 들르면 될 것이라고 여겼던,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던 오만함. 나는 내 안에 있는 냉정과 교만을 선명하게 확인해 버리고 말았다. 한편 한때는 나에게 즐거움과 설레임을 주었던 것들이 통째로 사라져 버려 아뜩하고 아찔하여 서늘해진 가슴을 도닥였다.




세상은 너무 많이, 그리고 빨리 변한다. 이미 지금까지도 충분히 그래왔고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는 더욱 더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그 가운데 이제는 별로 수요가 없을지도 모르는 것, 무가치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가감 없이 지워졌다. 이제 최신 사양의 컴퓨터에는 아예 디스켓을 넣을 수 없게 된 모델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어쩌면 요즘의 어린 친구들은 플로피 디스켓 자체가 어느 공룡 시대적 화석같이 멀고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나의 그 하얀색 디스켓에도 내가 찾는 자료는 들어있지 않을 수도 있다.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기대를 거는 것도 이쯤 되어보니 소용없는 일임을 수용해야했다.

나는 그때 너무 어리고 한없이 가벼웠다. 그래, 그러했다. 그러했었다. 내가 꽤 어린 나이에 딴에는 흥미로운 글감을 상상해 냈다는 것에 도취된 나머지 그 기록들을 소중히 여기고 잘 보관할 생각까지는 해내지 못하였다. 그것이 한참이 지난 뒤에 어른이 된 나로부터 찾아질지도 모른다거나 혹은 그 비슷한 생각에까지는 미칠 수도 없었을 만큼. 이제와 다시 온 책상 서랍들을 뒤지고 책장의 책들을 모조리 꺼내 난리를 피우고 책장 사이사이를 뒤지고, 없어진 이메일 계정들로 인해 서러워하는 것이 문득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나.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끝까지 변명 아닌 변명을 해 본다. 내가 벌써 이만큼 자라고 변해버렸듯, 세상도 변하고 그 속에 살아있던 많은 기억들마저 흐릿해져가는 것이라고. 이것은 응당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라고 합리화의 합리화를 시도했다. 내가 거주지를 옮기더라도 글을 써둔 노트는 반드시 챙기는 것과 이메일 계정에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일과 워드파일을 어떻게든 백업해 두는 것을 까맣게 놓치고 있었듯이, 나 역시 그것들로부터 잊혀져버린 것만 같다. 이미 다시는 찾을 수도 없도록 차단되고 봉쇄되었다. 마치 벌을 받은 것만 같았다. 스스로에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래놓고 나는 문필가 되기 따위를 운운하며 살아온 것이었으니 말이다. 길든 짧든 자세하든 대략적이든 간에 스스로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을 함부로, 쉽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아무리 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소중한 것들은 조금만 관심을 놓고 있으면 그렇게 방관한 것을 여봐란듯이 금세 날아가 버린다. 뒤늦은 후회 속에서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고 소중한 무엇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법과 잊혀진 것들,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그리워하는 법을 마음에 새겨야한다. 무엇도 쉽게 여기거나 당연히 여기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이 그 어떠한 구질스러운 변명과 속이 빤히 보이는 자기합리화와 깊은 늪과도 같은 교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정을 주고 사랑했던 것, 소중했던 것들을 지키고 기억하고 최소한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그 부재함을 기릴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옛날 어렸던 나에게 부족했던 것이며 이제와 모든 것을 털리고 난 뒤 자숙의 과정에서 깨달은 바이다. 한 발 늦음으로 인해 안타까워 마음 아프지 말고 소중할수록 더욱 그것들에 관심과 마음을 쏟아주어야겠다. 그러다 세월이 더 흘러 정말로 그것들이 없어져야만 해야 할 때가 온다면 그때는 어른스럽고 조용히 보내주되 사는 내내 그리워하고 기억해주자, 그러마하고 자신과 약속을 맺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자기 심장이 뛰어 살아있음을, 무엇을 향해 심장이 뛴 적이 있었음, 그로인해 사람으로 살아가는 행복을 느꼈음을 모두 확인시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 내 글들의 커버에 쓰인 모든 이미지들은 Pexels 앱을 통해 다운로드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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