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에도 급이 있다(?)
소수자 서사
Minority Narrative
각종 서사가 난무하는 시대에, 당연 마이너리티의 세계에도 ‘마이너리티 서사’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 ‘무슨무슨 서사’라는 것이 퍽 강퍅한 구석이 있단 말이다. 여기에도 소위 먹히는 것, 팔리는 것이 있으며 주류와 비주류가 있다. A급과 B급이 있고 폐급도 있다. 트렌드라는 것이 있다. 클리셰도 있다. 대체로 트렌드로 장기간 근속도장을 찍고나면 클리셰화 되는 것도 같다. 마이너리티 서사에도 예외는 없었다.
소수자 하면 이제는 거의 ‘통상적’으로 성소수자를 일컫는 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일지도 모른다. 꾸준히 논의되어왔었고 다양한 커뮤니티들이 형성되어왔으며 이과 관련된 다양한 문화콘텐츠들이 제작되어왔다. 그 결과, 드디어 “소수자” 라는 범주 내에서도 하나의 거대담론으로 자체적인 서사를 보유한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성소수자들은 무지개나 유니콘 등의 심볼들로 브랜딩되고 있는 중인걸로 보인다. 나는 아무리 내가 마이너리티 소수자 비주류 운운해도 성소수자는 아닌 것 같아서 그런지 몰라도 성소수자와 그 관련 하위문화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다. 하지만 성소수자를 내 상위키워드 “마이너리티”에 속하는 아주 의미있는 원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생각보다 더 성소수자들이 ‘소수자’ 라는 상위카테고리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인지도가 더 높을지는 몰랐다. 그리고 아직도 성소수자에 대한 언급은 굉장히 민감한 주제에 속한다. 하여 나도 이 성소수자들의 센서티브한 인기를 빌려다가 “드랙퀸” 사진을 다운받아서는 제목 카피라이팅까지 하여 이 글을 쓰고 있는데 그 내심에는 사실 실험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과연 이걸로 내 마이너한 글은 드랙퀸의 후광에서 떨궈져 나온 콩고물을 조금이라도 얻어먹어 볼 수 있을까 하는 알량하기 그지없는 실험 같은 것을 해보려는 속셈 말이다.
이번에는 구글(google.com) 에서 같은 검색어를 입력하고 처음 디스플레이 되는 사진들을 스윽 살펴보았다.
대체로 인종이나 민족 관련된 이슈들을 다루는 이미지들이 디스플레이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조금 더 많은 기회를 달라는 것들,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특정 지정학적 장소에서 온 사람들이 겪는 문제들과 같은 포스팅들로 연동되는 이미지들도 있었다. 그리고 연관검색어는 주로 사회학적 테마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핀터레스트(pinterest.com)에서 같은 검색어로 서칭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값을 얻었다. 구글과 비슷하게 인종이나 민족에 관련된 내용들이 나왔고 그중에서도 특정 인종적 민족적 지정학적 국가들 출신의 이민자들을 지칭하는 “model minority”, 즉, “모범 소수자” 와 연결되는 이미지들도 눈에 띄었다.
지난 해, 미국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숨진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의 사망사건으로 촉발되어 한동안 떠들썩했던 “블랙 라이브즈 매터 2020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전히 소수자의 처우와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로써 그리고 그와 함께 건드려진 뇌관처럼 순식간에 폭발한 상처입고 학대받고 소외받은 자들의 분노의 표출로써 전세계인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
그러다가 블랙 목숨만 목숨이냐라는 목소리도 거세졌다. 코로나가 중국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와 유사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아무리 터잡고 오랫동안 살았거나 이미 그 나라에서 나고자란 시민인 사람들까지 억울한 린치, 테러등을 겪는 사건들이 하도 많이 접수되면서 이제는 색깔 따지지말고 모두의 인간다울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른바 “올 라이브즈 매터 (All Lives Matter)” 였다.
나는 여기서 생각했다.
연대와 커뮤니티를 중시 할 것 같았던 소수자들은 생각보다 “끼리끼리”현상이 더 심한 것 같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 시리즈를 계속 써나가면서 언제고 한 번 다뤄보고싶다.
마이너리티 서사에서는 특히 색깔이 중요하다: 피부색, 젠더색, 정치색, 이념색, 지역색 등등.
이런 의미에서 성소수자들이 사용하는 무지개색 깃발은 의미가 있다. 모든 색깔을 아우르겠다는 포용적이고 수용적인 제스처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현실 속 색깔들이란, 그 색깔에 따라서 또 차등화가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 중에서도 ‘상대적 다수’와 ‘상대적 소수’가 발생하고 그 상대성에 입각한 ‘수적 우세’와 ‘수적 열세’에서 기인하는 입김싸움, 영역싸움 같은 것들도 벌어진다. 우리가 더 피해자다, 아니 우리가 더 피해자야. 그러면서 결국 피해자마인드셋의 고착화라는 수렁으로 빠져들어갈까봐 심히 걱정된다. 이미 이런 판국에, 내가 쓰고자 하는 마이너리티는 대체 어느급 정도 되는 마이너리티일까? 그리고 나라는 이 마이너리티가 빠져들어버린 피해의식의 수렁이 있다면 나는 그 구멍 어느 깊이쯤까지 떨어진 상태일까? 그런것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드랙퀸도 아니고 트렌스젠더도 아니고 지금껏 살아온 결과 레즈비언도 (아직까지는??) 아닌 것 같고 따라서 ‘바이(bi-)’도 아닌 것 같다. 또 나는 블랙도 아니다. 인종적으로 따지자면 소위 말하는 그 ‘모델 마이너리티’과에 속하기는 한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싶은 마이너리티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마이너 되기(being minority)’ 는 이런 레이블링들로 규정만 하려고 하는것 같아 꽤 불편해진다. 나는 내 마이너함을, 내 소수성을, 내 비주류함을 하드웨어의 규격, 색상, 그리고
생식기의 모양이나 성적 지향만을 갖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마이너함은 고유함이다. 우리들 개개인이 모두 고유한 개별자들인 이상 우리는 저마다 얼마쯤 마이너하다.
나는 거기에 조금 더 주목하고싶다. 마이너함은 고유성의 발견이고 더 나아가 정체성의 토대라고 생각한다.
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드랙퀸도 아니고 블랙도 아닌데도 마이너한데,
그 이유는 내 존재의 고유성으로 인하여
태생적으로 ‘수적 열세’에 처해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