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창문 없는 방>
그다음으로 여자는 단출한 짐을 풀어 정리한 뒤, 할 일을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적지 않으면 무엇이든 잘 기억하지 못하니까. 적어야 해, 적어야 해, 적어서 기억하도록 해야 해- 여자는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수첩의 빈 장을 찾아 펼치고 펜을 쥐어 들은 것이다.
하나씩 적고 보니 이것저것 여러 가지가 적혔다.
그 목록들 중에는‘미용실: 머리 자르기’가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늘 길었다. 길고 탐스럽고 풍성하였다.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며 한 움큼 탁 잘라 가져와 베갯머리에 붙여놓고 언제고 뺨을 비비고 싶을 만큼 기분 좋은 감촉을 하고 있었다.
여자 주변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여자의 긴 머리까지 함께 좋아했다. 그 언젠가 무릎을 베고 누워있노라면 머리 결 대로 쓰다듬어주는 그런 손도 있었다. 여자는 그 손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아직도 잊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른 기억들은 거의 다 잊어버렸는데도 이것만큼을 아직 있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여, 여자에게 바로 그 ‘머리카락’을 자르겠다는 의지를 세운 것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여자는 시내의 미용실에 나가 허리까지 기르던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목덜미 부근에서 쳐내었다.
잘랐다기보다는 차라리 정말로 쳐내버렸다.
시원했다.
가벼웠다.
별로 섭섭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지하철이 터널을 지날 때에 그 검은 차창에 비친 자신의 낯선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머리를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번갈아 쓸어내렸다. 아직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적응되지 않아 자꾸만 자꾸만 그녀는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질했다.
'그래-'
여자는 생각했다.
머리가 다시 길 때까지, 아니 최소한 쇄골을 넘을 때까지, 그때까지 이 방에서 살아보자 하였다.
그리고 목덜미 너머로 더 이상 없는, 반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머리털로 덮여있던 어깨를 가만 양 팔을 교차시켜 그러쥐어보았다.
앙상한 어깨였다.
여자가 입고 있던 연보라색 앙고라 니트가 여자의 어깨를 없어진 머리칼 대신 가려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산했다.
이제부터 앞으로는 무얼 하며 살 지에 대해서 당분간만큼은 생각지 않기로 했다. 사실 이렇게 따로 나오는 일에 성공한 것만도 여자에게는 커다란 수확이었다. 집에는 너무 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여자가 터득한 여자가 되는 방법이었다. 말을 아끼거나 숨기거나 삼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은 엄마한테, 심지어 제일 친한 친구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조차도 비밀이 하나씩 늘어나는 것.
여자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말하자면, 그런 어른이 되었다. 그렇고 그런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많은 것들과 마주해야만 했다. 많은 한계점들은 일상생활 중간중간 속속 나타났고 협소하고 알량한 사고의 폭을 절감할 수밖에 없던 순간들을 수긍하기 싫더라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고 천박함과 고귀함 사이의 간극은 사실 종이 한 장 정도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이런 종류의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때 맞춰 한 번씩 잘 놀라 주기도 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여자가 창문을 ‘자발적으로’ 고사한 것은 이런 것들은 모두 치사스러우며 그런 설정 가운데 자신이 놓여있을 수밖에 없다는 데서 적잖이 실망했기 때문이다. 보다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자면, 여자는 제 자신이 결코 순수하지 않다는 것과, 그것은 곧 자기 내면의 꿈틀대는 천박함이 상상 이상으로 거센 에너지를 품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기에 그 자체로서 괴로웠다.
해서, 얼굴을 들고 해를 마주할 자신을 상실했던 것이다.
부끄러운 제 자신을 ‘옛다’ 하고 보란 듯이 비춰대는 햇살이 무서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