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창문 없는 방>
언니는 여자가 염려했던 것처럼 여자를 경멸하거나 버려두고 혼자 나가버리지도 않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여자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뿐이다. 그 모습 그대로. 단지 조금 놀라웠던 것은 언니가 여자를 보고서 여자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었다는 것이다. 항상 찬바람이 쌩쌩 불던 그 언니가 말이다.
얼마 간의 시간차를 두고 언니가 먼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그래서 그때 그 길로 떠난 거니? 그 사람은”
“떠났다기보다는, 이만 돌아간 거야.”
“그래서 너는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청승 떨고 지낼 거니?”
“마음 내킬 때까지. 그렇지만 나 정말 잘 지내는걸. 여기 좀 봐. 어딜 돌아다녀봐도 이런 기막힌 집은 찾지 못할 거야.”
언니는 집을 한 번 다시 찬찬히 빙그르 둘러보았다. 둘 사이에 잠시 동안의 침묵이 있었다.
여자와 남자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았다. 마지막이 너무도 명백하게 예상된 사람들에게 도대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일평생 후회를 하며 살거나 뉘우치며 살겠지 하고 짐작하겠는데 정말로 그들은 후회하거나 뉘우쳤을까? 설마, 서로를 그리워했을까? 아예 깔끔하게 잊었을까? 잊었으면 좋겠다 하고 여자는 생각한다. 잊어버리기도 했다, 실재로도. 아직 듬성듬성 몇몇 조각들이 남아있는가 싶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소리 없이 잊힐 따름이었다.
요란하게 휴대전화가 울렸던 적이 있다. 받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울어 젖히는 통에 그대로 거머쥐고 밖으로 던져버리거나 받거나 둘 중의 하나는 해야만 했다.
남자였다.
“울고 있니?”
“아니”
“목소리가 달라졌어. 물기가 느껴져서.”
“너는 귀가 밝구나.”
“울었구나.”
“아니.”
“울었으면서- 너는 자꾸만 감추는구나.”
감추는 데에는 이미 이력이 나 있는 여자니까.
“…. 울음을 감출 수 있을까?”
“넌 자주 그랬잖아. 그래서…”
“이제 그만 돌아가. 나도 돌아갈게. 정말로 이제 돌아가자.”
“그래서 울었니?”
“아니- 아니- 아니- 아니래도! 아니라니까 정말 왜 그래!!”
그녀는 그제야 비로소 후두 두두둑 하고 쏟아냈다. 터져버렸다. 울음이라는 것은 쏟아낸 것이다. 울음은 삼키거나 쏟아내거나 둘 중의 한 가지밖에는 방법이 없는 걸까.
그리고 그들은 말대로 정말 각자의 삶 속으로 돌아갔다.
몇 주쯤 지난 어느 날 오후,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빠꼼히 고개를 안으로 들이민 건 언니였다. 양손에 한 가득 뭔가를 챙겨 온 것 같았다. 답지 않은 활짝 물색없이 웃는 어린 여자애 같은 얼굴로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들 듯 들어오며 언니는 마치 선언을 하기라고 하듯, 선동이라고 해야 할까 싶은 말투로
“우리 오랜만에 그림 그리자!”
했다.
“응? 안 할래? 옛날처럼. 그림 그리자. 자, 봐봐- 집 싹 뒤져서 다 챙겨 갖고 왔어.”
언니는 뿌듯한 얼굴로 양손 가득 들고 온 화구 주머니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흡사 조증 환자 같이 들떠 보였다.
“무슨 소리야?”
“아까 이거 바리바리 싸 들고 낑낑대며 오는데 그 누구니, 그 그의 부동산 중개인, 그래 그 양반 만났다. 어디 가냐고 하면서도 손 한 번 거들어 주지 않는 거 있지? 그래서 벽에 그림 그리러 갑니다. 하고 왔지. 창문 그리러요. 그러니까 창문을 그린다고라? 하면서 재밌어 하드라.” 언니는 어디서 그런 넉살이 늘었는지 중개인의 사투리까지 구성지게 흉내 내며 반쯤은 깔깔거리면서 말했다.
“벽에 창문을…. 그리겠다고?”
“응! 우리, 창문 그리자!!”
아직도 잠이 덜 깬 얼굴로 적잖이 당황한 여자는 어리둥절 해 하고 있었다.
“얘, 난 네가 내 동생이라 해도, 아니 내 딸이라 해도 네가 창문이 있는 데서 살 던 없는 데서 살 던 외따로이 나와 살던 단체로 합숙을 해 살던 솔직히 상관 안 한다. 그럴 권리가 없거든. 그건 이미 다 큰 네가 자기 선에서 알아서 결정할 네 몫이라는 거지. “
“응, 그래 고맙다 언니. 그런데..”
“응, 그래 그런데 그래도 일단 창문은 그리고 보자!”
이미 그렇게 말하면서 한쪽 벽면 아래에 바싹 붙여서 신문지들을 펼치며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꽤 야심 차게 작정을 해 왔던 일인 듯했다.
“앙? 벽에 그림을 그려요? 그냥 공사를 하지 뭐더러 그림을 그렸쓰까잉?”
하면서 언니와 마주쳤다던 중개사는 이튿날 여자의 집을 방문하였다. 중개인을 꼭 닮은 부산스러운 발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더니 초인종을 다급히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요, 도저히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궁금타 궁금타 혀서 보러 왔소. 하따야- 자매지간에 오붓허이 아주 야물차게 그렸소잉. 화가혀도 되겄소. 지내는데 다른 불편함은 없지라?”
뒷짐까지 지고 비스듬히 상체를 젖혀 서서는 무슨 화랑에라도 온 것 마냥 중개인은 여자들이 그린 창문 그림을 감상하였다.
“네 그럼요. 전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좋은 방 구해주신 덕이예요.” 여자는 중개인에 물을 한 잔 건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