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진료

소설 <창문 없는 방>

by Dichterin 여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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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자는 말하자면 조금은 빼 입고 외출을 했다. 지나가는 길에 자전거를 타고 볼일 보러 나가던 중개인을 만난 여자는 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따-곱구마이-- 거, 셋방 아가씨 근자에 연애하요?”


중개인의 농담 같은 수인사를 건네받았다. 여자는 웃었다.




마지막 치료였으니까. 사랑니의 흔적은 아직 움푹한 감이 있다. 이 흔적도 곧 살 이차고 뼈가 차오르며 메워질 테다. 이제 웬만해서는 다시 거기 갈 일이 없을 테니, 한 번쯤의 용기를 내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필 거기에서 왜 여자는 칼국수를 말했을까. 날이 점점 더 추워지고 있었으니까. 계절적으로 보면 그런 날에는 왠지 칼국수 같은 것을 마주 앉아 먹으면 서로 따뜻하고 편안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고, 한 그릇을 다 하고 났을 때는 한층 더 가까워져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을 것도 같지만, 사실 정확히는 여자 그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진료가 끝나고 수납대에서 처방전도 받았다. 필요 이상으로 친절한 간호사의 삼엄한 눈초리를 벗어날 기회를 엿보아야 한다. 그 정도 규모의 병원에서 그 정도로 보기 드문 젊은 의사니까, 간호사들도, 심지어 청소하러 오는 나이 든 여자들까지 모두 탐내고 있을 심산이 크니까. 그들은 마치 그 의사가 자신들의 관할 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의 주변을 의식하고 기웃대었다. 정말로 보통내기들이 아닌 것 같았다.


이번 마지막 진료는 그가 아닌 다른 의사였다. 그자가 의사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손이 바빴기 때문에 치위생사가 대신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걸어 나왔다. 분명 바로 직전 맡았던 케이스가 심각한 환자의 잇몸과 엄청난 사투를 치르고 난 모습이었다.


“저기요, 선생님- “

아마 여자는 이렇게 먼저 그 피로에 절은 치과의에게 말을 붙였을 것이다. 마스크를 벗으며 여자를 본 의사가 반응했다.


“아 네, 환자분. 아직 계셨군요, 뭐 문제 있으세요?”


이런 식의 담화는 대체로 너무 식상하다. 그런 식상한 상황이 빚어낸 식상한 분위기 속에서 예상 가능한 식상한 대사가 나오는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동시에 참으로 딱한 일이기도 했다. 결국 딱 그만큼을 벗어나지 못하여 응용력이나 창의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피차 일말도 다르지 않게 똑같은 두 인간들이라는 것만이 한층 뚜렷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의사가 분명 ‘문제’가 없느냐고 물었으므로 여자는 잠시 어떤 문제를 말해야 할까 머뭇거렸다. 그 문제는 다름 아닌 의사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다는 여자의 욕구였다. 그걸 어떻게 효과적으로 압축하여 전달할지 여자에게 의사와 대면한 그 순간에는 모든 것들이 죄 제한적이었다.


“그건 그렇고-“

의외였다.

의사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오늘 어디 가세요? 되게 예쁘게 하고 오셨네요?”


이런 일은 여자의 예상에 없던 시나리오다.


“네 뭐.. 그냥 조금 저기 어디 좀 가야 해서요.”


이제쯤 다시 호흡을 고르고서라도 제대로 말을 해야만 했다.


“선생님, 몇 번 오는 동안 진료 친절하게 안 아프게 잘해주셔서 감사하고요.”


“별말씀을요”


“그래서 뭐 언제 시간 되시면, 저 잇몸 완전히 다 나으면 칼국수라도 한 그릇 하실래요?”


여기까지 말하기 위하여 여자가 지난밤에 거울 앞에서 같은 말을 수 없이 되풀이했던 그 지난한 연습이 빛을 보는 듯했다.


“칼국수 좋지요. 저 칼국수 좋아합니다.” 하고 의사는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그것이 멋쩍음이었는지 수줍음이었는지 성취감이었는지 알지 못할 웃음기를 얼굴에 만연하게 펴 바르고는 인사를 하고 그 길로 뒤돌아 나왔다. 나와서 잰걸음으로 종종 걸어 나오다가 병원 건물이 멀어질 즈음부터 해서는 거의 숨이 찰 만큼 달려왔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무언가 순조롭게 풀려버린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하였으며 그동안 여자를 오래도록 무겁게 했던 것들로부터 약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체험을 한 것만 같았다.






집 앞에 다 다다라서야 여자는 괜히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안심하며 숨을 골랐다.

이때 여자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가 있었다.


여자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해서 달려 나오느라 도대체 그와 칼국수를 언제 어디에서 먹을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와 버린 것이다.





머리는 얼마쯤 자랐을까?

여자는 그 깊은 가을 끝자락의 오후에 미용실을 나오며 잘린 머리칼을 쓰다듬었던 것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그때처럼 여자는 조용히 머리 밑단을 만져보았다. 여자를 닮아서 수수하고 또한 부드러웠다.


쇄골은 이미 훨씬 지나 있었다. 여자가 처음 여자의 그 창문 없는 방으로 들어와서 긴 머리를 댕강 자르고 돌아온 날 작정했던 것처럼, 그녀는 잘린 머리칼이 다시 쇄골에 닿을 때까지 그 집에서 지냈다. 머리카락은 이제는 쇄골도 이미 지나 살짝 윗가슴 깨를 향하여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니트를 꺼내 입는 계절 에로 돌아와 있었다. 시월. 찬란한 계절이다.


목까지 올라오는 칠부 소매 보라색 앙고라 니트를 꺼내 입은 여자는 거울을 보며 한 번 더 매무새를 점검했다. 여자가 그 옷을 좋아하는 이유는 목 부분에 머리를 끼울 때 얼굴에 와닿는 앙고라 소재의 부들함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고개를 돌려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정도 들고 마음에도 들은, 보면 볼수록 한층 더 신기한 마법 같은 공간. 정말로 창문이 한 군데도 뚫리지 않은 신기한 방이다. 그 한편에 여자가 언니와 달려들 듯 매달려 그려낸 창문이 보였다.


그 창문이 갑자기 살아나 불쑥 튀어 올라서는 부조(浮彫)의 형상을 하더니 진짜 창틀과 유리로 변하고 바깥의 계절감이 창에 고스란히 비춰들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