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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해 Nov 12. 2021

시끄러운 고독은 생채기를 남기지 못하고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책을 사랑해서 시작하는 직업은 대개 슬픈 결말을 불러오는 듯하다. 책을 복수의 개념으로 이해했을 때, 대부분의 책이 사랑보다 더 많은 슬픔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설이 그러한데, 슬픔은 사랑보다 다채롭게 빛나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나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문장의 변주와 다르지 않다. 

이 책의 주인공은 폐지를 뭉치는 '압축기'를 작동하는 기사다. 좋게 말해 기사이지 현대사회의 흔한 노동자에 불과하다. 그런 그는 폐지 속에 이따금 섞여 들어오는 훌륭한 책들을 모으는 취미가 있으며 그 책들과 사랑에 빠진다. 책들을 사랑하게 되어 폐지를 압축하게 되었는지, 폐지를 압축하다가 책들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압축기'로 상징되는 도시와 자본주의의 부품처럼 느껴지는 그에게도 사랑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신의 끓어넘치는 열정을 속으로 불태웠을 뿐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고, 그 결과 손쉽게 대체되고 만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존재를 세상에 알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대체 가능한 노동력과 부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묵묵히, '잘' 이루어지는 일들은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못한다. 그것은 종종 '일상'이라는 단어로 치환되면서 색이 바래고 커튼 뒤로 쓸쓸히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주인공의 폐지 더미 생산이 그러했고, 그 안에 숨어 있던 고전의 발견이 그러했다. 그것이 어떠한 가치와 지혜를 담고 있건 간에, '누구의 마음에도 생채기를 내지 못한 책(주인공, 혹은 어떠한 목소리도 내지 않는, 못하는 누군가)'은 그렇게 폐지 더미(경쟁에서 탈락한 인간)가 되어 새 종이(노동력)로 대체, 재탄생될 뿐이다. 예측 가능하고 항거 불가능한 자본주의적 비극이다. 늘 속을 시끄럽게 하지만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고독을 닮았다.

그러나 전반적인 비극적 분위기보다도 그의 일상에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들어 일상을 변화시켰던 여자의 존재가 가장 선명하게 도드라지는 것은, '불씨' '잉걸불'로 비유된 여자의 끓어넘치는 열정 탓이겠다. 시끄러운 고독이 아닌, 시끄러운 말과 행동들로 주인공의 기억 속에 커다란 생채기를 남겼다. 늘 난로를 덥혀두고 몸짓으로 서로를 달구던 몇 안 되는, 뻔하디 뻔한 사랑의 순간이 다채로운 슬픔의 순간보다 선명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슬픔보다 기쁨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어디에서 비롯할까. 강렬한 기쁨이 강렬한 슬픔보다 힘이 센 탓이 아닐까. 

그러나 습관처럼 기쁨보다 슬픔을 믿는 것은, 그 힘의 논리가 얼마나 커다란 그림자를 가졌는지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기쁨이 그림자를 잃어버리는 밤에는, 어두워진 골목에 음산하게 서 있는 기쁨이 그림자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음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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