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하늘 Oct 20. 2018

<삼삼한 이야기>그 202번째 단추

가을에 할 일 

첫 번째. 주인없는 낙엽 줍기. 낙엽주인 하기.  


두 번째. 햇빛 줍기. 햇빛 주인하기. 


세 번째. 시 줍기. 과거에 주운 시 나눠주기.  

                                                                                                             

박지혜 시집 <햇빛> 수록


시작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햇빛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질경이가 좋겠다고 했다 투명한 유리병이 더 낫겠다고 했다 하얀 말을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 그냥 노래를 부를까 노래를 부르느니 물로 들어가겠다며 발끝을 바라본다 몽환적이라는 말을 좋아하느냐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모든 말에 속고 있다고 했다 차라리 일요일의 햇빛을 생각하겠다고 했다 무심한 지렁이를 생각하겠다고 했다 가벼움에 대한 얘기를 다시 하고 싶다면서 울먹였다 가볍고 빛나게 떨어지고 있는 고독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텅 빈 모음만을 발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가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그들만 사는 섬에서 나오지 않았다 흐린 눈빛의 그들은 언덕을 그리거나 나무를 심거나 물고기를 불렀다 물빛을 닮은 눈빛은 항상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굳이 다른 곳을 말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그들은 따라가고 싶기도 하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더 웃거나 웃지 않는 방법에 대해 생각 중이라고 했다 너는 담배를 입에 물고 나는 스타킹을 끌어올리며 다리를 뻗었다 쉬지 말고 계속 얘기를 하자고 했다 어제는 모순을 끌고 가는 아름다운 너를 보았지 오늘은 태양을 한없이 바라볼 거야 

무언가 오래 바라보는 일은 자랑할 일이라고 모든 건 사랑 때문이라고 설명 없이 우겼다  비밀의 풀을 본 일이 있니 비밀의 풀이라는 표현이 싫다고 했다 소용돌이치는 물로 들어가는 여자를 따라간 일이 있니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불안해도 괜찮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북극에 가는 건 어떻겠느냐고 들뜬 아이처럼 말했다 털이 많은 동물을 상상하자고 했다 북극의 하지의 환한 밤을 상상하자고 했다 그런 건 혼자 하라며 문을 열었다 그러면 해 넘어가는 하늘은 어떨까 물었다 서로가 닮아 있었다 드디어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했다 이제부터 입을 열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삼삼한 이야기>그 201번째 단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