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새벽이 되면, 닫은 문 사이로 여러 사람이 다녀간다. 가만히 누워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첫 번째 목소리.
"직선거리가 가장 빠른 거에요"
지난 겨울, 을지로를 돌아다니며 취재 도중 만났던 연구원 분이 있다. 세운상가에서 기술 중개인으로 일하던 그에게 나는 도시재생 관련 인터뷰를 요청했었다. 원래는 1시간 정도 인터뷰 시간을 잡았으나 대화를 나누다 보니 3시간이 훌쩍 넘어갔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그에게 여러 개인적인 질문거리를 던졌다. 어쩌다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이런 저런 살아온 이야기들까지. 그는 미대를 졸업하고 책디자이너로 일을 하다가 진로를 틀어서 박사 학위를 따고 현재는 기술 중개인 일을 한다. 어릴 적 기계를 갖고 놀기 좋아했던 기억을 따라 늦은 나이로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고서 새로운 분야로 뛰어드는 용기, 나이를 비롯한 타인의 시선 등 현실적인 이유들이 그의 발목을 잡았을 터인데, 오롯이 10여년을 투자해서 지금 자리에 있는 그가 대단해보였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지금 그가 얼마나 본인의 일을 재밌어하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는 작은 부품을 조립해서 만드는 키트를 꺼내왔고 우린 레트로한 박스 표지 디자인과 지금보다는 약간 촌스러우면서 디테일했던 설명서를 보며 같이 수다를 떨었다. 일이든 사랑이든. 자신을 잊은 채로 어딘가에 빠져든 사람은 멋있어 보인다.
당시에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직업적인 성취 말고 말 그대로 하고 싶은 일들.
"빙 돌아가지 말고 하고싶으면 부딪히세요."
"몰입할 수 있는 일만이 기계를 이길 수 있어요. 밤새서 내가 하고 있는 거. 그게 본인이 앞으로 할 일이에요."
그는 욕심많은 나에게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는 정면으로 다가가라고 말했다. 지금도 이 말이 종종 귓가에 들린다. 그에겐 10여년의 공부가 본인의 길로 걸어가는 가장 짧은 직선거리였고 나는 또 어디를 향해 정면으로 걸어갈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두 번째 목소리.
"조금이라도 좋으면 맞는 거야"
조금씩 좋다. 벽에 걸어둔 사진을 바꿀 때, 맘에 드는 글귀를 만났을 때, 웃긴 간판을 발견했을 때, 골목 구석구석 들어가서 생소한 풍경을 만날 때,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찍으면서 놀 때,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때,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으며 다른 나라에서의 삶을 상상할 때, 아름다운 그림 앞에 서있을 때, 내 맘대로 낙서할 때.
조금씩만 좋아도 된다고 누군가 말했다. 찰나면 충분하다. 미친듯이 좋아하지 않아도 내가 잠깐 두근거렸던 순간을 기억해서 계속 그 길로 가면 된다. 잠깐의 두근 거림으로 마음이 힌트를 준 것이다. 이쪽으로 가세요라고. 여전히 피식피식 웃으면서 책을 읽고 크레파스로 박박 문질러 그림 배경을 칠하면 기분이 좋다. 글, 그림, 사진, 노래. 누군가의 창작물 앞에서만 설렌다. 몇년 전, 그 몇년 전에도 나는 낙서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좋아했었다. 계속 해야할 거 같다.
세 번째 목소리.
"죽을 거잖아요. 그쵸?"
누군가는 남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본인의 목소리를 잃는다.
반대로 남의 목소리를 타고서 내 목소리를 찾을 수도 있다.
종종 경쾌한 은사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린 죽는다. 죽음을 당겨와 생각해보면 죽을 것 같이 날 괴롭히는 일도 별거 아닌 일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지금은 별 거 아닌 일로 보이는 것들이 죽음을 당겨서 생각해보면 죽을 듯이 후회되거나 슬프다.
사람들이 다녀간 밤에 느즈막이 나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내가 피식했던, 조금 즐거워했던, 두근거렸던 내 마음의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