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여정으로 본 <노팅힐>
사랑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대명사 <노팅힐>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대단하다. 찌질한 영국 남자와 세계적인 여배우의 로맨스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실현 가능성이 0%로 수렴하는 줄거리 덕분에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영화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교과서적인 스토리 전개와 치밀한 서사구조로 사람들의 공감과 몰입도를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거대한 키워드를 말하고자 한다. 바로 구조주의이다. 구조주의는 이야기 안의 심층구조를 분석하고 하나의 틀로 만들어내는 비평이론이다. 미국의 신화학자인 캠벨은 동서양의 수많은 신화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요소를 통해 원형신화의 존재를 밝혔다. 즉, 거의 모든 신화 내부에 존재하는 큰 틀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동화 속의 왕자든, 그리스의 열두 신이든, 심지어 스타워즈의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일정한 영웅의 사이클을 따른다. 결론적으로 여러 문화에 다양하게 산재되어 있는 신화들은 알고 보면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이 있고 그것이 원형 신화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 <노팅힐>은 사랑을 쟁취하고자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영웅의 모험담으로 재해석 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나는 영웅의 12가지 여정에 따라 <노팅힐>을 다시 보고자 한다. 영웅의 여정은 크게 세 단계인 출발, 입문, 귀환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영국의 작은 마을 노팅힐에서 여행서적을 운영하는 윌리엄 대커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자이다. 이혼 전 아내와 살았던 집에 조금 특이한 친구와 동거 중이며 매일같이 여행서점으로 출근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운명을 바꿀 날이 우연히 찾아오게 된다. 세계적인 여배우 안나 스코트가 그의 서점을 방문한 것이다. 이 놀라운 일에 적응하기도 전에 그는 길거리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 주스를 쏟아버리고 만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윌리엄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집을 나오면서 그와 키스를 나눈다. 윌리엄에게 일상 세계에서 벗어날 완벽한 소명이 찾아온 것이다. 이제 윌리엄은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모험의 길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모든 영웅이 한순간에 칼을 뽑고 용을 무찌르기 위해 달려가는 것은 아니다. 영웅에게도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 윌리엄 대커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감히 세계적인 여배우인 그녀와의 사랑을 꿈꾸지 못한다. 그저 그녀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초라함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그는 친구 스파이크와 함께 영화 속 그녀를 동경하고 그리워하며 모험세계로의 갈림길에서 방황한다. 그러던 중, 운명 앞에서 서성이는 그에게 첫 관문의 미션이 주어진다. 윌리엄은 그녀로부터 전화 메시지가 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떠난다. 윌리엄에게 주어진 첫 관문은 그녀가 있는 호텔로 찾아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다. 여기서는 그녀의 메시지를 기억해 알려준 친구 스파이크가 조력자의 역할을 했다.
무사히 호텔로 찾아간 윌리엄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자회견장에 들어선다. 그리고 잡지사 소속을 묻는 질문에 테이블 위에 보이는‘말과 사냥개’라는 잡지 이름을 대며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인터뷰를 가장한 둘의 은밀한 만남이 계속 되고 윌리엄의 바보 같은 질문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윌리엄은 애프터 신청을 받게 되었고 데이트를 이어간다. 하지만 둘의 사랑에도 시련이 찾아온다. 영웅은 입문 단계에서 고난과 역경이 도사리는 곳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부분이 동굴로의 접근이다. 동굴은 영웅이 상대하기 가장 힘겨운 적의 수뇌부가 있는 곳으로 모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다. 윌리엄은 동굴에 해당하는 그녀의 호텔방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그녀의 전 남친을 마주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의 남자친구를 마주한 최대의 역경을 맞이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적과 맞서 싸우지 않고 호텔 직원인 척 행동하고 물러난다. 평범한 일생을 살아왔던 자신이 그녀와 어울리지 않음을 느끼며 적에게 굴복한 것이다.
하지만 영웅은 거듭되는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하는 숙명을 지닌다. 시련은 영웅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된 위기를 말하며 영웅 서사에서 중요한 순간이다. <노팅힐>에서는 여러 시련과 극복 과정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 뒤 윌리엄은 계속 그녀를 그리워하며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누드사진 파문으로 숨을 곳을 찾아 갑작스럽게 윌리엄을 찾아온다. 둘은 서로의 깊은 사랑을 확인하고 안정을 찾았지만 다음날 윌리엄의 집을 찾아온 기자들로 인해 그녀는 오해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촬영차 영국에 다시 온 그녀를 보기 위해 촬영장을 찾아간 윌리엄은 또 다른 시련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윌리엄을 반겼지만 다른 배우에게 그를 험담했고 불행히도 헤드폰을 끼고 있던 윌리엄이 이를 듣게 된 것이다. 그녀는 윌리엄을 찾아가 그에게 사랑을 구했지만 이미 패배자의 기분을 맛본 그는 그녀의 고백을 거절한다.
윌리엄은 그녀에게 다시 고백하기 위해 기자회견장으로 찾아간다. 마지막 질문 기회를 잡은 윌리엄 대커는‘만일 대커씨가 정신 나간 바보였다는 걸 알고 무릎 꿇고 다시 고백한다면 받아주실 건가요?’라고 묻는다. 그녀의 대답은‘물론이죠'였다. 여기까지가 행복한 결말을 맺은 윌리엄의 모험이야기였다. 보잘 것 없던 그가 진정한 사랑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진정한 영웅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영웅의 마지막 여정은 시련을 이겨낸 주인공이 일상세계로 돌아오는 과정인 귀환이다. 영화 <노팅힐>에서는 귀환의 과정이 그려지진 않았지만 아마도 아들, 딸을 낳아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을까싶다. 이 영화는 사랑만큼 값진 모험은 없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험은 평범한 인생을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자 각본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우리들의 삶은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지만 ‘고난의 극복을 통한 성취'는 우리가 평생 겪어야할 공통의 모험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에 상응하는 시련과 극복의 굴레에서 살아가는 인간일 뿐이다. 영국 평범남과 세계적인 여배우의 로맨스에 우리가 그토록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특별함과 평범함의 기준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영웅의 여정으로 본 <노팅힐> 평론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