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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하늘 Mar 07. 2017

<삼삼한 이야기>그 서른여덟 번째 단추

포장지에 대한 세 가지 단상


하루종일 포장지를 쌌다. 풀었다.

글을 썼다. 지웠다.




#1. 녹취록


녹취록을 풀었다. 인터뷰 내용을 다시 들으며 타이핑하는 일은 할 만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집중해서 계속 글을 썼다. 지웠다.  

내 손은 인터뷰 내용을 기록하느라, 내 머릿 속은 어떤 글을 쓸지 구상하느라 바빴다.


이 글을 어떤 포장지로 꾸밀까.


계속 생각했다.

글 또한 음식처럼 원재료를 살리면서 보기에도 좋아야 한다.  

하루종일 포장지를 쌌다. 풀었다.  

 


#2. 잘 쓰기 위한 글


상장을 받기 위한 글과 논술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글이 있다.

그런 종류의 글은 고침도 많고 문체어휘도 다르다.    


초등학생의 나는 드라마 감독님께 주인공이 죽어서 슬프다고 메일을 썼던 애였다.  

하지만 대외적인 글을 쓰는 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러웠다.  


상장을 받았던 가짜 글보다 메모장에 쓴 단상들과 자작시를 더 아끼게 된다.  

어디 보여주기 창피한 구김살 많은 글들이 더 나답기 때문에.




자화상 / 스무 살의 양혜은이 쓰고 스물 다섯 살의 양혜은이 고침


무거운 일상에 취해 오늘도 잠에 들지만

웃으며 일어나는 긍정의 아침을 바란다


길거리의 거짓 술수에 마음을 뺏기고

서러운 세상살이에 식어버린 눈물도 흘리지만   

화덕 같은 사람들의 품이 나를 부른다

뜨겁지 않은 따뜻함으로 내 곁에 서있다

  

어제는 게으름에 지고 즐거움만 남아

집을 나서는 발걸음에 잊혀진 열정을 묻힌다

네모난 사람들은 바쁘게 벽돌을 쌓고   

내 마음은 하늘 위로 곡선을 그린다     


항상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꿈을 꾸는 나다

잃어버린 길, 이상을 향해 걷는다  




#3. 25 가지



알록달록하고 싶다던 나는

25가지의 색깔이 아닌, 25가지 포장지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나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기록하는 행위이자,

나를 가장한 모습의 이기도 했다.


매일을 여러 겹의 포장지를 벗기고 입힌다.

화려한 포장지 속에 꾸밀 수 없는 온전한 내가 있다.


웅크린 나, 오만한 나, 비겁한 나.  


온갖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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