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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하늘 Apr 16. 2017

<삼삼한 이야기>그 83번째 단추

회색인의 하루


#1. 기형도 시집

을 펼쳤다.

시인의 언어에는 온도가 있으므로.  



#2. 커피 얼룩

이 묻었다.

텅 빈 희망과 두꺼운 추억이 적힌 종이 위로.

갈색 점들이 찍힌 시집은 그럴싸해 보였다.

오늘은 얼룩진 하루이므로.



#3.어느 시인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놓고 기적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현실에 토라지지 않고서 아름다운 시어를 뱉는다. 하염없이.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하늘에는 벌써 튀밥 같은 별들이 떴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둥그랗게 잠을 잤다.


                                                 

                                                         기형도, <위험한 가계-1969> 중 일부


 


아름다워서 슬픈 문장들이 8000원짜리 꽉찬 위로를 준다.


기적이 없는 세상에, 


기적을 믿지 않는다던 그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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