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
늦잠을 아주 오래 자고, 책을 읽다가 영화 한편을 보니 새벽 4시쯤이다.
사람, 일 모두에게 싫증이 많아 늘 새로운 걸 찾는다.
근데, 지금 내 앞에 놓인 긴긴 쉼 덕분에 늘 하던 짓만 하고 있는 지금이
마치 하루종일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을 자는 것처럼 편안하다.
어쩌면 신선한 도전만큼 어려운 일.
익숙한 일과 사람을 꾸준히 소중하게 대하는 것.
첫 번째. 우린 함께 봄, 읽음
밤이 참 좋다. 소음도 덜하고 눈에 밟히는 사물이나 인물도 적다.
좋은 밤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이 내 밤을 예쁘게 색칠해준다.
대학 동기인 친구 1은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 나보다 훨씬 많은 영화와 책을 본다.
나에게 양질의 말과 글을 전해주는 주공급처이다.
우리가 늘 하는 짓은 서로가 안 읽은 책 일부분을 발췌해서 소개하기 또는 각자의 집에서 동시에 영화보기다.
(친구 1이 보내준 영화는 차곡차곡 쌓여 기쁨 폴더에 저장되어 있다.)
나는 그녀가 보내준 영화를 다운받고 우리는 하나, 둘, 셋과 동시에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중요한 지점은 숫자를 세고 동시에 같은 장면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굳이 뭐 이런 방식을. 이란 생각에 먼저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가 친구에게 혼난 적이 있다.
우린 다른 집에서 꼭 같은 순간, 같은 장면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친구와 나의 영화감상법이다. 어제도 우린 영화를 봤다. 친구는 중간에 졸리다며 배신했지만.
옆방 사는 친구 2는 나와 책(=생각)을 나누는 사이다. 그래서 심심하지 않은 일상을 보낼 수 있다. 다 읽은 책을 그녀의 방에 놓고 오기도 하고. 허락없이 친구의 방에서 책을 빼오기도 한다. 나는 오늘 그녀가 산 보스토크 잡지를 다 읽었고. 그녀는 내가 읽다만 보스토크 잡지를 집(고향에 있는 진짜집)으로 가져가 읽는 중이다. 주인이 없는 친구 방에서는 할 일이 많다. 책상 위에 초콜릿을 먹거나 조명으로 장난을 쳐도 된다. 익숙하다.
두 번째. 우린 조화롭지 않음
메로나
바나나우유
꼬깔콘
풍선
매력 돼지
노가리
일주일에 한 두번쯤, 두뇌회전을 해야 할 때가 종종 온다.
예를들어 잘 모르는 이에게 '뭐 먹었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바나나우유, 꼬깔콘, 메로나'라고 대답하지 않고.
혹은 '뭐하고싶어'라는 물음에 '노가리 뜯기'라고 말하지 않고.
'뭐해'라고 물었을 때 '하늘보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다음 질문에 부연설명을 하기 귀찮기 때문이다.)
...
나는 나를 둘러싼 조화롭지 않은 것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린 조화롭지 않음'에 동참하는 사람들만 만난다. 익숙하다.
세 번째. 우린 보통에서 놂
내 유년시절을 보냈던 제주.
시내 번화가에는 '보통사람들'이란 가게가 있었다. 지금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돈까스 등의 분식을 팔았고 요일별로 할인하는 메뉴가 달랐다.
맛도 보통. 인테리어도 보통.
지극히 평범했던 가게지만 당시 학생들에게는 대표적인 외식장소가 되어 '보통사람들 가자'는 말을 자주 뱉곤 했다. 적당한 가격과 맛. 보통에 대한 당연한 끌림이었을지도.
...
여전히 난 보통이 좋고 익숙하다. 퇴근을 하고 컴퓨터 학원을 다니는 일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
(실제로 자주 샛길로 빠졌다. 출결 상황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학원 강사님은 이직 준비를 하냐고 물었지만 이직 목적이 아니었다.
그렇게 똑똑하게 미래를 준비할 내가 아니다. 그냥 배워서 더 다양한 도구를 갖고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데 간절하지도 조급하지도 않다. 난 천천히 배워가는 보통사람이니까.
모자람을 자랑하는 일. 내게는 재밌으니까.
여전히 내 곁에 사람들에게 작은 불안을 공유하고 그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작은 비밀을 공개한다. 자발적 구경꾼이 되어 누군가의 미래를 대신 기대해준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보통에서 주로 논다.
익숙하다. 익숙해서 엄청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