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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놈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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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단우 Apr 18. 2020

 우리 아이가 때릴 데가 어딨다고 (3)

강아지가 보는 앞에서... 나는 주먹을 들고 내리쳤다.

  디디가 실례를 했다. 평소같으면 열려진 창문의 방충망 커튼을 제친 채, 나가서 실외배변을 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잠자리에 잔뜩 쉬야를 해버려서 두툼한 이불은 물론이고, 깔고 누웠던 매트리스와 베개, 심지어 내 등허리까지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푹 잠들어있던 와중에 이상한 촉감이 들어 눈을 떠보니, 잠자리가 온통 노오랗게 젖어있었다.




  "야!"




  모처럼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는데, 디디의 실례로 기분이 확 잡쳤다. 하루의 시작이 동물의 배변에서 뒹굴면서라니. 정말 있는대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 어딨어?"




  덮고 있던 이불을 둘둘 말아 바닥에 내려놓았는데도 디디가 보이지 않았다. 눈이 뒤집혀서 이불이고 베개고 마구 집어 던지면서 이부자리를 들쑤셨다. 남편이 덮었던 이불을 확 들쳐보니 디디가 침대 위로 뒹굴었다. 평화롭게 자다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눈이 동그래졌다. 디디가 튀어나오자 거칠게 안아들고는, 바닥에 말아놓은 이불 위로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너 정말 이럴 거야?!"




  다리가 허공 위에서 버둥거리자 옆구리에 디디의 몸통을 바짝 붙였다. 겁을 먹은 디디는 앞발로 내 옆구리를 차고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부쩍 신경질이 난 통에, 이 녀석의 발버둥은 불에 기름을 붓는 듯 했다. 녀석은 이내 발톱을 잔뜩 세우고는, 가만히 있으라고 내밀던 나의 손등에 기어이 생채기를 냈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올라 디디를 매트리스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내려놓기보다 내동댕이 친 쪽이 더 가까웠다. 푹신하지 않은 바닥에 나동그라진 디디가 아까보다 더 커진 눈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얀 앞발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디디의 반응에도 자비롭지 못했다. 눈이 뒤집힐대로 뒤집힌 상태였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을 주먹으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왜 나를 고통스럽게 하냐고 소리치며 바닥에 주먹을 내리 꽂았다. 바닥이 쿵쿵 울릴 때마다, 주먹을 든 손이 올라갈 때마다 디디는 움찔거리며 눈을 감았다 떴다. 몸통은 이미 저 반대편 구석에 가 있었다.



  주먹은 바닥에 내려 꽂혔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폭력의 대상은 바닥 따위가 아니라,
구석 속에 숨어 떨고 있는 디디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러면 안된다는 것을. 주먹을 휘두르고 욕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내가 겪었던 폭력의 사슬을 지워버린 기억의 저편에 묶어두고, 나는 이 쪽 세계에서 지극히 “정상”적이고 “밝은 성격”의 사람이어야 했다. 가면이라고 부르기에는 훨씬 더 두꺼운 철가면을 쓰고 상처가 없는 인간인 척 살아야 했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이전에 없던 혜택들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과거가 삭제된 채로 주어지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일단 학벌을 얻었고, 직업의 자유를 얻었고, 가정을 얻었고, 친구를 얻었다. 누구 하나 내 몸에 멍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을 묻지 않았다. 물론 멍이 생길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 XX.”



  엄마는 나를 향해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꽉 다문 치아 사이에서 거칠게 거품이 흘러나왔다. 주먹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쥐어졌는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엄마의 짧은 숏컷이 경련을 일으키듯 찰랑거렸다.



  조금 있으면 엄마의 주먹이 내 코를 강타할 것이다. 알싸한 코의 맛이 저절로 그려졌다. 엄마가 내 배를 발로 찰 타이밍도 계산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번처럼 배를 움켜쥐고 한참 일어나지 못해 다리에 쥐가 날 수 있으니까. 동시에 주변에 엄마가 집어들 수 있는 물건이 있는지 눈알이 빠르게 돌아갔다. 지난번에는 먼지털이로 머리를 열 몇 대 맞았고 청소기 흡입구로 등을 맞았으니, 오늘은 무엇으로 어떻게 맞을까? 나는 두려움, 공포 따위의 감정에 시간을 내어줄 틈이 없었다. 눈알이 돌아가는 것보다 머리가 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으로 엄마에게 분노를 주었다. 엄마는 깔끔한 성격 때문에 자주 청소기를 돌렸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화가 났다. ‘이런 집구석에서 청소기나 돌리도록 내 인생을 갉아먹는 짐덩어리’가 된 나에게 분노를 표출했다.



  매를 맞을 때마다 생각했다. 가만히 있자고. 나는 엄마를 괴롭히는 짐덩어리니까 가만히 맞아야 한다고. 혼날 짓을 해도 맞고, 혼나지 않을 짓을 해도 맞아야 한다고. 그런 생각으로 엄마의 매질과 구타를 인내했다. 피가 보이는 날은 의연하게 물로 씻어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부터는 맞지 않는 날이 이상했을 정도였다. 머리가 굵어진 자식에게 손을 대는 날이 줄어들수록, 나는 우울감이 심해졌다. 차라리 맞는 쪽이 덜 우울했다. 엄마는 언어라는 도구를 계발해서 나를 때렸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욕설에 맞았다. 눈치를 보고, 맞고, 우울감이 해소됐다.






  때리는 존재와 맞는 존재. 내 안에는 두 가지의 방식만이 정상이라고 작용했다. 이런 이유로 디디가 소위 '사고'라는 것을 치는 날이면 '맞는 존재'가 되는 것이 당연했다.




  "맞을 만 하니까 때렸지."




  술에 취한 동생이 툭 내뱉었다. 시덥잖은 시비가 붙었을 때, 동생이 내 뺨을 때렸다. 그리고는 내가 맞을만 해서 때렸다고 말했다. 나는 가족에게 맞을만 한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맞기 좋은 존재였다. 오히려 내 쪽에서 가족을 때리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나는 가족의 뺨을 때린 적도 없었고, 뒷통수를 때리거나 짐덩어리라고 한 적도 없었다. 수동적인 공격이었다면 나를 향해 무섭게 달려오는 성난 동생의 팔뚝을 꼬집는 정도였다. 내가 맞았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잘못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나는 그냥 맞는 존재였을 뿐이었다.



  디디도 어렸을 때, 맞는 존재였다. 문제는 가족에게도 하지 않았던 손찌검을 디디에게는 고스란히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맞는 존재였지만, 맞고 있지만은 않았다. 내가 받은 분노를 나보다 약한 존재에게 풀이하는 사람이었다. 온전한 폭력의 피해자가 아니었다.



  집을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신 지 반 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어색하게 "다녀오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선물이라면서 재래시장에서 5만원에 주고 산 작은 강아지 두 마리를 양 손에 들고 들어오셨다. 황갈색 강아지는 꾹꾹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집안을 발발거리며 돌아다녔다. 강아지는 며칠 동안 회충 섞인 변을 보더니, 조금 후에 단단한 변을 누게 되었다. 황갈색 강아지와 함께 데려온 흰색 바둑이는 같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금새 죽어버렸다.



  그 강아지는 나를 퍽 좋아했다. 미래를 예견한 본능인지는 몰라도, 자꾸 내 옆에 몸을 밀착해 앉으려고 하고 귀찮다며 밀쳐내도 다시 찹쌀처럼 착 붙어 앉았다. 강아지는 무척 사랑스러웠다. 때때로 사고를 치는 바람에 엄마가 분노하면서 집어 던지려 찾아다닐 때에도, 엄마 몰래 어딘가에 조용히 숨겨주기도 했다.



  강아지가 아무리 사랑스럽다고 했다 하더라도, 우리 집에 들어온 이상 강아지는 맞아야 했다. 하루는 집을 비운 사이에 호기롭게 식탁 위로 올라가 게걸스럽게 돈가스를 다 먹어치운 적이 있었다. 입가에 튀김가루를 묻힌 채 씨익 웃던 날을 잊지 못한다. 우리 식구가 오랜만에 먹는 고기 반찬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손을 들었다. 트라우마고 뭐고 개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에, 엄마에게 배운대로 강아지를 때렸다. 동생이 말한 대로 '맞을 만 한' 짓을 했으니까 당연히 때렸다. 강아지가 내 손을 피하려고 하면 억지로 내 앞에 끌어다 앉혀놓고 혼을 내고 '때찌'를 했다. 짧은 시간의 훈육이 아니라, 동물학대를 하고 있었다.



  강아지는 첫 폭력의 기억에 충격을 받아 낑낑거렸다. 맞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낑낑거림은 으르렁거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것으로 변했다. 맞는 것에 익숙한 나에게는 그 저항이 충격적이었다. 나도 하지 않는 저항을 감히 너 따위가 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강아지에게나 나에게나 충격이 큰 날이었다.






  출렁거리는 디디의 볼살을 만지려 손을 뻗었다. 디디는 내 손길에 놀라서 이빨을 드러냈다. 본능적으로 눈을 흠칫 감아버리고 이빨을 드러냈다. 요즘은 아예 깨무는 시늉까지 한다. 그러더니 자기도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겸연쩍게 혀를 내밀며 입맛을 다신다.



 그런 디디에게서 어린 날의 나를 보았다. 그러면서도 디디를 향해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때, 어린 날의 가족을 발견한다. 가족이 나를 향해 날린 폭력의 기억들을 발견한다. 나도 마찬가지인 사람이었다. 폭력은 기억의 굴레 안에서 어쩔 수 없이 답습되었다. 이래서 가정폭력을 경험한 아동들이 성인이 되어 동물학대범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동물학대범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이렇게 안심할 수 없었다.


  디디가 내 손길에 움찔하는 손길이 죽을 때까지 계속 된다면, 그만큼의 댓가를 영원히 지고 살아야 마땅하다. 나는 동물학대를 했고, 그에 대한 댓가로 평생 속죄하면서 살아야 한다. 유년시절이 망가졌다고 해서, 아이의 유년시절까지 망쳐버릴 이유는 없었다. 온전히 나의 잘못이다.



  아직도 생각한다. 과거로 돌아가 디디에게 손을 들거냐고 나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영원히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여주지도 않을거고, 평생 네 손길을 피하며 눈치만 보게 될 건데 때릴 자신이 있냐고 묻고 싶다.



  그 때로 돌아간다면 디디도, 나도 모두 안아주고 싶다. '많이 아프지?'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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