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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놈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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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단우 Apr 08. 2020

더이상 아이가 돌아보지 않았다

노령견의 늙음을 받아들이고, 펫로스 증후군을 능동적으로 대비해야 했다.


"디디야."




  어느 날부터 디디가 뒤를 돌아보는 날이 적어졌다. 가까이 곁에 다가가기만 해도 흠칫 놀라기도 하고, 내 인기척을 알 지 못해 뒤로 펄쩍 뛰는 날도 있었다. 나이듦의 증거. 이제 내 목소리를 듣는 날이 줄어들었다. 청력은 줄어 들었지만 마음에 남은 목소리는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 큰 목소리로 부를 때면 귀를 뒤로 솔깃해 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처음에는 일부러 모른체하는 행동인 줄 알았다. 워낙 독립적인 성격이 강하고 자기 고집이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티를 많이 냈기 때문이다. 그런 터라 무엇이든 간에 호불호가 강한 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 익숙한 터였다. 그런 익숙함을 넘어 이제는 ‘좋다, 싫다’하는 투의 작은 움직임도 사라지는 모습을 보니 뭔가 변화가 생겼구나 하고 직감했다.





2013년. 노익장의 저력을 보여주던 시절. 동네 뒷산을 2시간 동안 산책하면서도 신이 나서 빨리 가자며 조르고 있다. 심지어 여름 산행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예전보다 조금 슬퍼졌다. 간혹 나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이 눈의 느낌이 공허할 때도 있었다. 지금껏 안구질환이라곤 결막염이나 눈꺼풀에 난 다래끼 정도가 전부였건만... 이제 공허한 눈빛에서 오는 늙음은, 늙음 자체가 질병으로 다가왔다.




깊고 큰 눈망울이 매력인 디디. 검은색에 가까웠던 눈동자에 점점 파란 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개의 늙음. 첫 만남에서 느꼈던 활력 넘치던 생기는 시간은 생의 뒤편으로 소멸되고, 점점 그녀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르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늙음이란, 본디 사람에게 있어서도 퍽 슬픈 것이어서 감당하기에 수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하찮은, 이 작은 짐승에서 쏟는 정성은 그와 비례한 양의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아니, 눈빛과 교감으로만 감각할 수 있는, 그 몸짓에 늙음에 대한 슬픈 대화는 정말 많은 시간의 인내를 요구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 시간은 온전히 이 개를 위해 쓰여질 것이다. 그녀가 영원한 향기로움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녀의 늙음 앞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없는, 함께 앉아있는 것이 전부일 뿐인 인간임을 깨닫는다. 날마다 나의 나약함에 좌절한다. 나약하지만 그녀에게서만 강한 존재. 나약하다고 주저할 수 없는 일이다. 자꾸 아픔을 감추려는 그녀의 배려에 나는 든든한 인간으로 보답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는 최소한과 최대한의 최선으로.




어느 봄 날의 산행 중. 파릇파릇한 새싹을 비추는 따스한 햇살을 함께 맞이하며.







  개의 나이듦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의 보금자리의 지평을 좀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 이상으로. 남은 시간을 좀 더 보내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글을 알 지 못하지만, 글이 막힐 때마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등 뒤에 와닿는 것을 느꼈다. 좀 더 힘을 내라고, 좀 더 나를 기억해달라고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 없는 목소리의 시선을.



  누구의 인정도 아닌 그저 개 한 마리에게 인정받는 글을 쓰고 싶다. 너를 기억해서 좋고, 너를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어서 좋은 글을. 내게 주었던 그 사랑만큼이나 계속 추억하고 마음껏 눈물 지을 수 있는 글을. 네가 사랑한 만큼이나 나 역시 사랑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글을.



  나의 무기력함으로 너를 더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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